손을 살짝 흔들었다. 반응은 안 돌아왔다.
해나는 곧장 몸을 휙 돌렸다. 그러더니 시끄럽게 날뛰기 시작한 남자 둘의 몸을 교문 밖으로 밀어내며 소리쳤다.
"너희 여기 오지 말랬잖아! 우리 학교도 아니면서! 가, 빨리 가!"
해나가 낑낑대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규진이가 빠르게 걸어 교실로 향했다. 민욱이와 나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순 없었다.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내내 조금 떨어진 규진이의 책상을 곁눈질로 조금씩 엿봤다. 제법 오랫동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어제 세찬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나까지 속이 심란해졌다.
들은 바에 따르면 그 망나니 같은 놈들이 규진이를 괴롭혔다고 했지. 그 당시는 규진이와 친하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른다. 물론 내가 직접 못 봤다고 해서 친구의 지난일을 가볍게 여길 생각은 없다. 따지고 보면 나도 그 녀석들에게 농구 코트를 뺏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녀석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덩달아 해나까지 나쁜 애라는 생각은 역시나 들지 않았다. 규진이 눈에는 모두가 한 덩어리로 보이는 듯했지만 말이다.
해나가 내게 말했다. 그들 중 하나가 친구의 남자친구여서 탐탁치 않아도 어울리게 된 거라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아까 전 교문에서도 해나는 질색이라는 듯 그놈들을 밀어내지 않았던가.
운동회는 내일.
내가 해온 것, 하려는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규진이에게 그런 말을 할 재간도 없을 듯했다. 오늘 당장 내가 해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털어놓는다면 규진이는 내 의도를 절대로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려보자.
그런데 그 때라는 게 오지 않으면 어쩌지? 때가 되어서 설득하려고 해도 날 이해해주지 않으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어떡할까?
괜히 펼쳐둔 빈 노트에 펜으로 마구잡이로 아무 낙서나 해댔다. 2주나 되는 답답했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내일이 그놈의 운동회 날이다. 하필이면 왜 지금 와서 마음이 약해지려 하는 걸까?
마음은
포말처럼
말려올라
부서지고
다시 차오르다
모래 위에
흔적으로 남아
태양빛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를
반복한다
운동회 날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졸음을 쫓아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긴장했단 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혼이 빠져나가 우리집 지붕 언저리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말끔히 했다. 기껏해야 운동회일 뿐인데, 누가 보면 수능이라도 치르러 가는 줄 알겠다. 애써 마음을 가벼이 먹어보려 했다. 거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제법 효과가 있었다. 그래. 기껏해야 운동회. 하루 시끄러웠다가 내일이면 곧장 평소대로 돌아가는 별것도 아닌 행사였다. 나는 세수를 마저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학교에 갈 준비를 마저 했다. 그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행동이 굼떠졌다. 뭔가 잊은 것이 떠오를 것 같은데. 머리에 안개가 낀 듯 희뿌연 감각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체 뭘 떠올리려 했지.
몇 초가 지났다. 나는 내 책상 서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도 명확하게 뭔가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머릿속에 흐릿한 윤곽으로 남은 상이 점멸하며 머무는 것 같았다.
"티켓……."
잘 보이는 곳에 모셔둔 공연 티켓 두 장. 아빠가 공짜로 얻어 왔다며 선물해준 그것이었다. 이것 참 기묘하다. 왜 뜬금없이 지금 이런 게 떠올랐을까?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지만 난 그 종이 두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행동의 의미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왠지 부적을 챙기는 듯한 기분일 따름이었다.
아침은 먹는둥 마는둥하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지각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미묘하게 늦은 시각이었다.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공기를 마시며 학급별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참여 인원들이 모두 운동장에 모이긴 했는데, 우리 학교 운동회는 학년별로 다른 날짜에 따로 진행되기 때문에 막상 이렇게 보니 숫자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교장 선생님의 개회사가 끝난 후에 반별로 찢어져 운동장 가장자리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거기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규진이는 같은 반이었기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마지막으로 봤던 것처럼 음울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간 운동회 같이 쓸데없는 행사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툴툴대더니, 지금은 나름 즐기는 듯 빠릿한 모습이기까지 했다. 다른 반이긴 하지만 민욱이와 세찬이의 얼굴도 인파 속에서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둘 다 다른 반이니 지금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재잘대며 걷고 있는 해나. 의외로 금방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금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눈이 마주칠 뻔해 얼른 하늘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반별로 지정된 위치를 찾아가고 나서는 곧바로 첫 시합이 시작되었다. 줄다리기였다. 군중 속에 파묻혀서 나 하나쯤 힘을 보탠다고 별달리 변하는 것도 없을 것 같지만, 막상 그 두꺼운 밧줄을 잡아 끌다 보면 어느새 온몸을 뒤로 당기고 있었다. 승패를 떠나 처음 시합을 그렇게 시작하게 되니 없던 의욕도 솟아날 듯했다.
줄다리기에서 그런 의욕을 느낀 것은 나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음 시합은 발야구였다. 연습 때는 다들 설렁설렁 하는 인상이었는데, 당일이 되자 다들 없던 승부욕이 오르는지 공을 차는 발길질에 힘이 더 실린 듯해 보였다. 그 와중에 경기하는 해나를 보았다. 원래 이기고 지는 것에 진지한 해나였던만큼 자세부터 달라 보였다. 한 달 동안 같이 아르바이트를 해봐서 아는데 해나는 힘도 꽤 센 편이었다. 과연 집중해서 걷어찬 공으로 점수를 내고 나자 곧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옆에 앉은 규진이를 슥 돌아봤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규진이도 나를 보았다. 달리 할 말이 있어서 본 건 아니었기에 적당히 너스레 떠는 표정만 짓고는 다시 진행중인 경기에 집중했다. 괜히 예민하게 규진이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누굴 보고 있는지까지 규진이가 신경 쓰진 않는다. 규진이가 해나를 좀 싫어하긴 해도 내가 그쪽이랑 어울리는 걸 탐탁치 않아 하는 것뿐이지, 사람 자체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사실 둘은 대화 한 마디도 나눠본 적조차 없었다.
발야구 경기가 끝나고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듯한 해나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반응은 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