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24화

기껏 다잡은 마음이 도로 풀리기 전에 얼른 운동장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by 하이드

다음은 축구였다. 우리 반 경기에 나도 수비수로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경기의 수비수란 그리 주도적인 역할을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잘하면 좋고 아니어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용인되는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내겐 익숙한 자리이기도 했다.


다른 때였으면 그런 역할에 딱히 불만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한 번씩은 필요한 일을 하는 위치라는 게 외려 내 성질에 맞았다. 그러다가 한 번 괜찮게 승리에 기여할 때도 생긴다. 그럴 때는 다른 친구들도 잘했다고 추켜세워주니 기분이 좋다.


그랬다. 지금까지는 그 정도로 충분했던 게 맞았다. 그런데 오늘은 기묘할 정도로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지난 2주의 달리기 연습이 나의 내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다. 혹은 어딘가에서 내가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거나.


물론 둘 다일 수도 있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선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지나고 보면 한심하게 느껴질 행동들을 했다. 같은 팀의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텐데, 나한테 먼 곳일지라도 공이 굴러온다 싶으면 돋보이고 싶어 무리하게 쫓았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런대로 괜찮게 넘어갔지만 결국 한 번 크게 실수를 했다. 우리 골대 근처로 온 공을 몰고 억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다 그만 공을 뺏기고 만 것이다. 내가 너무 멀리 온 탓에 비어 있는 우리 골대가 위험에 처했다. 다행히 골키퍼가 절묘하게 슛을 막아내 위기는 넘겼지만, 그 원인을 만든 나는 팀의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똑바로 좀 해!"


"왜 자꾸 네 자리 벗어나냐!"


방금 전까지 그렇게 의욕에 찼던 게 무색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바보 같은 꼴을 우리 학년 모두가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눈들을 제치고 단 한 명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해나는 이런 걸 안 보고 있으면 좋겠다. 막상 고개를 들어도 해나가 어디에 있는지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축구 경기는 우리 반이 이기게 되었다. 물론 내가 잘 기여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결과가 좋으니 좋게 생각하고 잊을 수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지금 얼간이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 건 결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다음 경기가 다름아닌 내가 나갈 이어달리기였기 때문이다.


그거 한 번을 잘하려고 여태 연습을 해왔고 마음도 굳게 먹었다. 나 자신과의 승부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걸 앞두고 이렇게 되다니.


어쨌든 경기는 이겼기 때문인지 우리 팀에서도 나한테 굳이 뭐라고 다그치는 애는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가려 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대수롭지 않게 돌아보는데 뺨에 차가운 500ml짜리 생수병이 닿았다.


"안녕?"


그러자마자 해나의 얼굴이 보여서 나는 놀라 펄쩍 뛸 뻔했다. 겨우 태연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해나는 차가운 생수를 계속 내게 내밀고 있었다.


"너 공 잘 차더라. 목마르지 않아?"


물을 주겠다는 건가? 나는 어영부영 해나가 내민 생수를 받아 들었다. 그제야 제대로 앞을 보니 해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바구니에 생수를 잔뜩 넣고 나르고 있었다. 자기네 반에게 줄 물을 가지러 갔다 온 모양이다.


"고마워. 잘 마실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한데 해나와 같이 있는 여자애 중 하나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난 그 애를 알아봤다. 시내에서 해나랑 같이 있었던, 또 어제 교문에서 해나랑 같이 있었던 애다.


그 애는 딱히 숨길 의도도 없는 듯 뾰족한 시선으로 날 보더니 해나에게 말을 걸었다.


"해나, 이거 우리 반 물이잖아. 막 줘도 돼?"


"괜찮아, 괜찮아. 겨우 한 병인데 뭐 어때서 그래? 얘도 지금 열심히 뛰어서 목 마를 거야."


해나는 별 대수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삐딱하게 반응했던 여자애는 뭐라고 더 덧붙이진 않았다. 해나는 나에게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물을 들고 자기네 반으로 종종대며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짧게 바라보다가 나도 우리 반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내 얼굴은 겉으로는 무덤덤해 보였겠지만 실은 꽤 많은 생각이 그 안에 묻혀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체육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늘 나올 때 챙겼던 티켓 두 장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대망의 마지막 순서, 이어달리기 시합이 시작됐다. 모두가 많이 주목하고 있었다. 내게는 다른 의미로 의미가 매우 큰 차례이기도 했다. 그간 겪었던 일을 돌이켜 보니 별일 없었던 것 같으면서도 다사다난하게 느껴지는 게 묘했다.


해나가 준 물을 마시며 차례를 기다렸다. 축구 시합에서 있었던 실수가 꽤나 마음을 괴롭히긴 했지만 차가운 생수와 함께 목 뒤로 넘기기로 했다. 이제부턴 2주간 열심히 했던 노력이 의미가 있었는지를 시험해야 한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리는 거다. 몇 분이 지나고 출발선에 설 시간이 찾아왔다.


"지고나서 울지 마라."


우리 반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에 규진이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격려해준 말이었다. 그것에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것이 괜한 가책인가 싶었다. 기껏 다잡은 마음이 도로 풀리기 전에 얼른 운동장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이미 우리 2반은 물론 4반 역시 출발선에 서서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해나가 첫 번째 주자인 모양이었다.


어느정도 선수들 위치가 정리가 되자 관중들의 시선도 점차 집중되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긴장감이 올라왔다. 내가 앉아서 이런 걸 지켜보는 입장이었을 땐 몰랐다. 기껏해야 운동회에서 달리기 좀 하는 게 뭐가 대수냐는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자리에 잠깐이라도 선다는 건 의외로 심력이 드는 일이었다. 연습 때도 다른 학생들이 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기껏해야 건물 안에서 창문으로 엿보는 것에 불과했다. 축구 시합을 했을 때는 나 말고도 같이 경기를 하는 사람이 스물 한 명이나 있었다. 그렇기에 특히 평생 남의 눈에는 잘 안 띄게 지내온 나로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이 어떻든 세상은 알아서 굴러간다. 2주간 그렇게 무르고 싶지 않다며 달리기 연습을 했는데. 막상 때가 되자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자고 한참 속으로 뇌까려야만 했다.


그때 시작됐다. 해나와 우리 반 여자애가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이어 신호가 들리자 둘은 대뜸 앞으로 튀어나갔다. 명색이 계주로 뽑힌 만큼 둘 다 잘 달렸다.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고, 끝까지 비등한 채로 다음 주자가 대기하는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계주 둘이 또 땅을 박차고 뛰었다. 나는 그 다음 차례. 이쯤 오니 마음을 가다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뛸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일이 전부 완벽히 준비가 됐을 때 벌어지지는 않는가 보다. 두 번째 주자들이 뛰고 나서 얼마간 지나자 우리 반이 차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한 바퀴 돌아올 즈음엔 극복이 불가능한 정도까진 아니어도 확연히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그런 때에 내가 배턴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연습을 해댔는데도 정작 그걸 받아 들자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받자마자 나름 열심히 뛰었음에도 상대 주자와의 차이는 방금 전보다 더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허탈해하기보다 되려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최소한 그간 연습했던 게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운동장을 반 바퀴 돌아 목표 지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저 꾸준히 하던 대로만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자 내가 빨라졌는지, 아니면 상대가 체력이 달렸는지, 간격이 차츰 좁혀지는 것이 보였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거리가 좁혀지다 못해 내가 추월해버린 거였다. 그만큼 힘을 끌어내 달렸는데도 손에 든 배턴을 넘길 무렵엔 오히려 몸에 힘이 넘치는 것만 같았다.


배턴을 건네받은 다음 주자들이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그 순간 고무줄이 끊어진 듯 내 다리가 우뚝 멈췄다. 몇 초간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와 양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얼마간 그러고 있다가 모래 바닥 위에 그대로 털퍽 주저앉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해나의 등이 보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해나 또한 나처럼 어깨를 들썩이는 중이었다.


마지막 계주들은 경기를 끝내기 위해 열심히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어느정도 숨을 돌린 나는 평온하게 승부가 갈리는 광경을 구경했다. 내가 기를 쓰고 추월을 했던 만큼 우리 팀이 처음에는 앞서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침착하게 달려 앞선 상대편을 추월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 팀이 점점 속도가 떨어지는 듯했다. 이제 남은 건 반 바퀴도 안 남은 시점이었고…….


결국 우리 반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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