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25화

마지막으로 도망칠 기회를 이젠 날렸다는 걸 깨달은 나는

by 하이드

누구라도 이견 없을 격차로 마지막 주자들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승리한 4반 애들이 바로 앞에서 박수를 치며 자축했다. 특히 해나는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그에 반해 나는 기이하게도 평온한 마음이었다. 마지막에 못해서 미안하다 사과하는 같은 반 친구의 등을 괜찮다고 두드려주면서도 그렇게 강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물론 이겼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는 짧은 시간 동안 열정을 쏟아부었으니 끝까지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면 나도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환호했을 정도로 기뻤겠지. 하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밤 최선을 다해 달리기 연습을 했고 본 경기에서 후회 없이 뛰었다. 잘 뛰는 걸로 소문이 난 상대 주자를 추월하기까지 했다. 원래의 나였다면 이루지 못했을 성과를 내게 됐으니 헛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 우리 반이 기다리는 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기질 못했으니 마냥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격려해주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승연이 생각보다 되게 잘 뛰더라."


"그러니까 내가 얘 계주시키자고 했잖아."


"이길 뻔했는데 아깝다!"


그런 말들을 듣다 보니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해나에게 받은 물을 받아서 들이켜고 보니 무척 개운했다. 이제 운동회는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벌써부터 선생님들이 운동장 가운데 서서 학생들을 집합시키기 시작한 게 보였다. 다른 애들과 함께 운동회를 끝내러 움직이며, 나는 해나가 있는 4반 행렬을 건너다봤다. 이제는 결심을 마쳤다.




시합이 끝나고 남은 차례까지 전부 끝마치고 나자 나에게만 다사다난했던 운동회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학생들은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바로 해산했다. 규진이랑 같이 어정거리고 있으려니 민욱이랑 세찬이가 당연하다는 듯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연히 같이 갈 거라고 여기는 몸짓이었다. 이제 오후 5시가 채 안 되는 시각이었으니 어디든 같이 놀러가게 될 거라고 다들 여기는 듯했다. 일단 얼마간은 서로 시답잖은 잡담부터 나눴다. 오늘 뭐 했느냐부터 시작해서, 너네 반이 우리 반한테 졌으니까 형님이라 불러라, 네가 뛴 경기도 아니지 않느냐, 정작 네가 뛰었을 땐 눈 뜨고 못 봐 주겠더라 등등. 그런 시시한 농담들.


하지만 내가 달리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친구들이 보기에도 왠지 대견하기까지 했나 보다. 내가 힘들게 연습하던 걸 다들 바로 옆에서 봐서 그럴 것이다.


"연습을 얼마나 했으면 겨우 2주만에 그렇게 발이 빨라지냐?"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깝다 야."


특히 연습을 가장 많이 도와준 세찬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였다. 규진이 일에 관련해서 탐탁찮은 눈치도 꽤 보였으면서, 그래도 옆에서 계속 봐 왔던 만큼 성과를 낸 것에는 나름 뿌듯한 모양이었다.


그런 친구들의 말에 나는 특별히 대꾸하진 않고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제부터 어딜 갈지 정하려 하는데 세찬이가 나서서 말했다.


"난 오늘 우리 반 친구들이랑 놀기로 약속해서 안 될 것 같아. 미안! 다음에 봐!"


세찬이는 그렇게 손을 흔들려 사라져버렸다. 그 정도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으므로 민욱이와 규진이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다소 난처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도 이제부터 빠질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화의 타이밍을 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오늘은 다른 데 좀 가야 겠는데."


"뭐? 어디 가려고?"


"할 일이 좀 있어서."


나는 어지간하면 이런 자리에서는 발을 빼지 않은 편이었다. 가끔 빠지더라도 기분상의 이유나 몸이 피곤해서 같은 이유가 많았다. 그래서 일이 있다는 말에 민욱이와 규진이는 곧이 들리지 않은 눈치였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려면 어때. 일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둘 다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실은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민욱이는 그렇다 쳐도 규진이가 말이다. 지금 나는 해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해도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르는데 거기 서서 해명 아닌 해명을 하고 있기는 시간이 부족했다.


돌아서서 운동장을 한차례 휘둘러보니 벌써 학생의 반절은 교문을 나가고 드문드문 흩어진 무리들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해나의 얼굴을 찾았다. 어쩌면 이미 학교를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귓전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여러 목소리 사이에 파묻히다시피 한 웃음이었지만 제대로 들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해나가 친구들에 파묻혀 걷고 있었다. 모두 여자들이었고 숫자가 많았다. 그 무리는 후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살금거리며 그 뒤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성큼성큼 걸어 그들을 앞질러 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일이 진짜로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실제로 닥쳐보니 상상 이상의 용기가 필요했다. 아직 무를 기회가 남았다는 생각이 마구 솟아났다. 그럼에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라고 느꼈던 걸까.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여자애들과 정면으로 마주봤다. 그 애들이 나를 봤다. 이상하게 보는 시선,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시선 등이 섞여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도망칠 기회를 이젠 날렸다는 걸 깨달은 나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이해나."


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분명히 내가 이름을 똑바로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못 들은 것처럼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날 다시 보았다.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솔직히 해나한테 온전히 집중하기가 쉬운 게 아니었다. 양옆으로 진을 치다시피 한 해나의 친구들 탓이었다. 갑자기 앞질러와서는 대뜸 이름을 부르는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는 대강 상상이 갔다. 아니, 실은 상상이 안 간다. 지금 내가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확신을 못하겠다. 무표정한 얼굴일 거라 생각하는데 남들 눈에는 그저 바보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날 보며 키득대거나 가느다란 눈으로 뜯어보는 시선들은 그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특히 어제 교문에서 해나와 같이 있던 친구는 노골적으로 나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까지 지었다. 어쩌면 지금 이게 굉장한 실수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닥쳤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입에 올렸다.


"저번에 낭송했던 시 말이야."


"뭐?"


그 결과 진짜로 떠오르는 걸 그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나 스스로도 당혹스러운 말인데 듣는 해나는 더욱이 희한하다는 반응을 했다.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그건 누가 쓴 거야?"


그러자 해나는 입을 헤 벌렸다. 주위에서도 점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지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나는 해나가 다음 행동을 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속내가 어떠하건.


이대로 그냥 무시당할 것까지 각오했다. 그런데 해나는 눈을 약간 내리깔더니 비교적 수더분해진 분위기로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고는 내게로 한발짝 다가와 눈을 마주보았다.


"잠깐 둘이 얘기 좀 하자."


그 말은 듣는 나는 물론이고 뒤에 있는 해나의 친구들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해나는 내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따라가기 시작했다. 해나의 친구 중 처음부터 나를 고깝게 보던 여자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계속 쫓았다.

이전 24화파도의 집 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