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한들대는 바람이 불어오자 잎사귀들이 스스스 옹알거렸다.
그 말은 듣는 나는 물론이고 뒤에 있는 해나의 친구들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해나는 내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따라가기 시작했다. 해나의 친구 중 처음부터 나를 고깝게 보던 여자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계속 쫓았다.
해나는 후문으로 향했다. 문을 나서 학교 밖 인도로 나갈 때까지 거침없이 빠르게 걸었다.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계속 걷기만 했다. 나도 말을 더 붙일 생각도 않고 그 등을 쫓아가기만 했다.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는데 대부분 부정적인 전망이었다. 뒤돌아본 해나가 대뜸 화부터 내면 어떡할까 하는 상상이 계속됐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나는 어느 조그만 공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놀이공원 미끄럼틀 근처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간 노란 빛이 더해진 햇살은 비스듬히 내리쬐고 그 등쌀에 나뭇잎도 차츰 어두운 옷을 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들대는 바람이 불어오자 잎사귀들이 스스스 옹알거렸다.
마침내 해나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나는 긴장했으나 해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러다 대뜸 내뱉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 말에 나는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걸어오며 했던 어떤 상상과도 다른 말이었던 것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얼빠진 소리나 다름없었다. 내가 어이가 없어 잠시 물끄러미 보자 해나는 아차, 하는 소리를 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다.
"너 괜찮아?
해나는 옆머리를 약간 집어 검지로 살살 꼬아대며 내 시선을 살짝씩 피했다.
"너 때문이잖아.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사람이 안 당황하겠어?"
그 말을 듣자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역시나 그게 이상한 짓 맞았구나.
"미안해……."
"사과할 필요는 없고. 하여간 되게 이상한 애라니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나마 그런 말을 하는 해나가 화가 난 건 아닌 듯해 다행이었다.
"응…… 할 얘기가 뭐야?"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할 얘기 있어서 길 막은 거 아니었어?"
그건 정확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따라오는 동안 대화의 흐름을 간직하지 않았다고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한다면 다소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해나가 머뭇대며 말했다.
"무슨 시가 어쩌고……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그랬지?"
내 바보 같은 소리에 해나가 슬슬 짜증을 내기 전에 뭐든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까 그건 머리를 거의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이라 스스로도 되새겨보아야 했다. 어디 보자. 내가 왜 대뜸 그런 말부터 꺼냈을까.
"개학일에 네가 방송을 했잖아. 그때 네가 읊었던 시 말이야."
"그게 왜?"
"누가 쓴 시인지 궁금해서."
연못에 조약돌 하나를 던져 넣은 듯 해나의 동공에 약한 파문이 번져갔다.
"방송 제대로 안 들었나 보네. 어디서 보고 가져온 시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나는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서두를 뗐다.
"혹시 그거, 네가 쓴 건가 싶어서."
'내 마음 설익어, 떫은 맛 가득하던 계절에.' 그렇게 시작하는 시였다. 그날 그걸 듣고 노트 한 켠에 적어두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꼭 해나의 목소리로 들어서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저 처음 들었을 때 자꾸만 마음이 가고 잊히지 않는 글자들이어서 그랬다. 내 귀로 듣고 기억나는 대로 적었기 때문에 정말 정확히 기록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긴 해도 그 안에 담긴 목소리는 제대로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글귀를 계속 되뇌이자 그 문장들 너머로 내가 매료됐던 누군가의 미소가 자꾸 들여다보이는 것 같더란 거다.
해나는 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려 하는 듯했다. 다만 내 눈에는 어설프게만 보였다.
"그거 이상하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을까?"
"뭐라고 설명은 잘 못 하겠어. 그런데 그냥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어."
"지금 너 되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거 알아?"
확실히 그랬다. 듣는 입장에서 어떻게 들릴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럼에도 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태 해나를 처음 알게 되고, 같이 일하고, 친해지는 동안에 알게 되었으니까. 이 애가 어떻게 웃고 화내고 말하는지 말이다. 그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얼굴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네가 시를 쓴다면 그런 느낌일 것 같았거든."
"너랑 나랑 그렇게 오래 알았던가?"
해나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시니컬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거기서 쌀쌀함보다는 뭔가를 감추려 하는 듯한 기색을 더 강하게 느꼈다. 나는 다음 말을 머뭇거렸다. 만약 내 추측이, 글자 뒤에 숨은 사람을 알 것 같다는 감이 정말 적중했다고 해도 여기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정말 잘하는 걸까? 이대로 한발짝 물러서야 될지도 모른다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또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해나는 저렇게 감추려 하고 소극적으로 굴지만 속내는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그렇지는 않지. 그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지는 않아."
"왜?"
지금 같은 해나의 모습을 이전에도 몇 번씩 본 적이 있어서다.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숨기고 싶고, 그걸 티 내려다가 아닌 척 정색으로 덮어버리는.
그때는 몇 번씩 손을 뻗어보려 하다가도 소심함에 금방 거두곤 했다. 어쩌면 그때 물어봤다면 답을 얻을 수 있었을 것 같았던 말을 지금 꺼내 봤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그 다이어리에 쓰던 시 아니야?"
해나가 뒤로 한걸음 주춤 물러나는 듯하더니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한테 그 다이어리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어 봤잖아. 지금 다시 대답해도 돼? 맞아…… 궁금해. 거기 뭘 쓰고 있는지. 놀리려는 거 아니야. 억지로 보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때 네가 나한테 물어봤던 걸 지금 대답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만 괜찮으면 그 다이어리를 한 번 보고 싶어."
"너 진짜 이상해. 그런 걸 여태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래도 뭐 나쁜 기분은 아니긴 한데."
꽤 간만에 해나가 나를 제대로 쳐다봤다.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상태로 해나는 양손을 펼쳐 들어 보였다.
"근데 지금은 그 다이어리 안 갖고 있거든. 보여주고 싶어도 못 보여줘."
"꼭 지금이 아니어도 돼."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찾던 물건이 바로 잡혔다. 그대로 끄집어내 천천히 해나에게 내밀었다. 해나는 그게 뭔지 얼른 알아보지 못한 탓인지 눈을 깜빡거리며 내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나랑 여기 같이 갈래?"
아침에 나올 때 챙겼던 그 티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