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랑, 다이어리랑, 이 공연이랑 무슨 상관인데?"
해나의 시선이 티켓 두 장에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까지 와서 열없어진 나는 주섬주섬 설명을 했다. 우리 아빠가 회사 일로 얻어다 준 티켓이며,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마음이 있다면 돌아오는 이번 주말에 가야 된다는 것까지 말이다.
"시랑, 다이어리랑, 이 공연이랑 무슨 상관인데?"
"나도 잘 모르겠어."
내 어설픈 변명에 해나는 이내 피식 웃었다. 간만에 보는 제대로 된 웃음이었다. 언뜻 거절하려는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해나는 손을 뻗더니 내 손에 들린 티켓 두 장 중 하나를 집어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 응, 알았어. 같이 가자."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간직하고 있던 긴장과 초조함이 매듭을 가위로 자르듯 단번에 풀어졌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같이 가자니. 내가 건넨 말이어도 정말로 승낙받게 될 줄은 몰랐던 걸까. 현실감이 없었다. 그게 나쁜 감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미 해나는 내 제안에 동의했건만, 요령 없는 나는 몇 번이고 그 말이 사실이냐고 거듭 확인을 받았다. 끝내 해나의 눈썹이 성가시다는 듯 꿈틀대는 걸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 그 짓을 그만두었다. 이제 와서 나에게 질려 말을 뒤집으면 어쩌겠는가.
"오늘 친구들이랑 놀러 가기로 했는데. 너 때문에 못 가게 됐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해나는 그리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벼운 미소마저 걸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재확인한 뒤 우리는 거기서 헤어졌다.
해나가 한 장을 가져가고 난 뒤, 나는 남은 티켓 한 장을 새삼 유심히 살폈다. 본래 여름에 관광을 위해 우리 도시를 찾은 사람들을 주 관객으로 삼아 개최되는 소규모 공연이었다. 8월달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을 해왔다. 이제 9월에 접어든 지도 시일이 꽤 지났지만 5회째 공연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 주말까지 같이 보러 갈 사람을 찾지 않았다면 티켓은 그대로 버려지게 됐을 것이다. 내가 봐도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운동회 날 밤, 해나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는데 몸이 들썩였다. 기껏해야 며칠 남았을 뿐인 주말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평생 가본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던 공연 하나 보러 간다고 이렇게 들뜬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법도 했건만, 그날은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저 기분 좋게 잠에 들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엄마가 사촌 누나가 서울에서 내려올 거라는 소식을 전해줬다. 개교기념일과 공강이 겹쳐 한 주 집에 내려와 쉬고 간다고 했다. 누나가 학기 중에 한두 번 내려와 얼굴 비추고 가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처음엔 대수롭잖게 들어 넘겼다. 얼굴이나 한 번 보려나 싶었다. 그런데 학교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생각을 좀 달리했다. 다가오는 주말에 해나를 만날 일에 대해 누나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누나한테 그런 걸 알렸다가 괜히 정신만 피곤해질 거라 여기고 입에 지퍼를 잠갔을 것이다. 하지만 방학 끄트머리에 누나에게 받았던 조언은 꽤 도움이 됐더랬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누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누나의 첫 마디는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야? 네가 웬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하니?
"그냥. 누나 내일 뭐해?"
"나?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려고 했는데. 요즘 과제하느라 힘들었거든."
"그럼 혹시 나랑 내일 시내 좀 같이 가줄 수 있어?"
누나가 짧게 침묵하고 수화기에선 나지막하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누워서 전화를 하던 누나가 자세를 고쳐 앉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왜?"
"나 옷 고르는 것 좀…… 도와줘."
돌아오는 누나 목소리는 제법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이런 걸 부탁하는 걸 누나가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누나가 듣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가 누나한테 이런 말을 다 하는 날이 오는구나. 그래, 좋아. 어디서 만날래?"
누나는 적어도 통화 중에는 내가 안 하던 짓을 하게 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충 짚이는 게 있는 것일까, 이유 같은 건 상관없는 걸까.
그런 궁리를 하며 어영부영 집과 학교를 왔다갔다 하니 하루는 금방 또 지나갔다. 목요일. 초저녁에 학교를 나서 시내로 나갔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누나는 이미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내 등을 퍽퍽 치며 웃는다. 내겐 언제나 익숙한 짓궂은 웃음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옷을 다 산다고 한담?"
"그렇게까지 말할 게 뭐가 있어? 사람이니까 옷은 당연히 사야지."
"너 네가 알아서 옷 사러 나온 건 처음 아니야?"
누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았다.
"너 요즘 들어서 안 하던 짓 되게 많이 한다. 저번에는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상담을 다 하질 않나."
그런 식으로 운을 떼는 걸 보고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어쩐지 어제 전화로 얘기했을 때는 평소와는 다르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는다 싶더니, 직접 만나서 질문하려고 잠깐 미뤄뒀을 뿐이었다.
나는 숨길 생각은 안 했다.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하기야 먼저 이것저것 도와달라고 했던 건 나였다. 좀 부끄럽기는 해도 그간 있었던 일들을 투명하게 털어놨다. 다만 내 입으로 말하기 너무 민망한 부분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대뜸 해나를 찾아가서 우리 둘만 아는 얘기를 꺼냈다는 건 아무래도 쉽게 입밖으로 내뱉기 어려웠다. 그런 부분은 간추리고 같이 공연을 보러 가게 됐다는 결론만 제대로 말했다.
"우리 동생 장하다. 여름에 알바를 시키길 잘했구나. 그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게 그렇게 되는 걸까. 곰곰이 되새겨보니 맞는 말이었다. 여름의 그 만남이 아니었다면 죽을 만큼 달리기 연습을 하는 일도, 그걸 통해 뭔가를 넘어섰단 성취감도 없었을 것이다.
누나는 나를 적당한 옷가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 마네킹 사이를 요리조리 서성이더니 셔츠와 외투 몇 개를 들고 와서 내 몸에 견주어 봤다. 나는 어정쩡하게 굳어서 누나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누나가 지적한 대로 혼자서 옷을 사러 오는 게 별로 익숙하진 않았다. 누나가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해주는 건 고맙지만 한편으론 얼른 끝내고 여길 나가고 싶었다.
"그나저나 너 이거 살 돈은 있는 거야?"
"여름에 일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거 아직 하나도 안 썼니?"
"거의 안 썼다고 봐야지."
방학 한 달간의 노동으로 내 평생 용돈으로 가져볼 거라 상상 못했던 거금이 들어왔다. 또 내가 그 돈이 있어도 부모님은 딱히 원래 주던 용돈을 줄이지도 않았다. 나중을 위해 아껴 놓으라고 하셨던가. 그래서 나는 용돈이 떨어졌을 때 친구들과 뭘 사 먹거나 만화책 몇 권 사는 데에나 좀 돈을 썼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월급은 거의 그대로 있었다.
"네가 나보다도 돈이 더 많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누나도 옷 하나만 사주면 안 돼?"
"어른이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럴 때만 어른이니?"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누나가 가져온 옷 몇 개를 더 봤다. 솔직히 내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누나가 뭐가 마음에 드냐며 거울 앞으로 끌고 가 질문해도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그냥 누나가 알아서 골라줘."
"네가 너한테 어울리는 걸 알아야 될 거 아니야."
"난 잘 모르겠는데……."
"지금이야 모르겠지. 근데 평생 누나랑 같이 옷 사러 올 건 아니잖아. 네가 사고 싶은 걸 고를 줄을 알아야지."
그러면서 일단 자기가 골라온 후보군들은 다 어느정도 괜찮으니 얼른 골라보라고 덧붙였다. 나는 쭈뼛대며 별 차이를 모르겠는 옷들 중 그나마 나아 보이는 것들을 선택했다. 누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것들을 계산대에 올렸다. 곧 계산을 마친 옷은 쇼핑백에 들어가 내 손에 쥐어졌다. 누나랑 같이 길거리로 나온 와중에도 내가 제대로 된 걸 골랐는지 모르겠어 얼떨떨했다.
문득 언젠가 해나와 나눴던 대화가 둥실 떠올랐다. 월급을 타면 뭘 사고 싶은 지 서로에게 물어봤던 날이었다. 해나는 이것저것 옷도 사고, 돈이 남으면 게임기도 사고 싶다고 말했지.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그냥 사고 싶은 게 없으면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될 일인데 왜 그 말을 하는 게 조금 꺼려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날 난 따로 돈을 쓸 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사고 싶은 것도 별로 안 떠오른다고. 그랬는데 결국 이렇게 와서 사고 싶은 걸 사게 됐네. 이번에도 원인을 거슬러 가보면 이해나였다.
평소 누나가 단골로 자주 온다는 경양식집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다 먹고 누나와 헤어질 때가 오자 처음 만날 땐 초저녁이었던 시각이 이젠 이슥해졌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금요일. 공연은 토요일이었으니 그야말로 지척으로 다가왔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잠자리에 들 때가 되어 방 구석에 놓은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누나랑 같이 산 새 옷을 끄집어내 몸에 걸쳐 보았다. 누나가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결국은 내가 고른 옷이었다. 좀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 거울 앞에 섰는데 그러자마자 괜히 어깨가 늘어진다. 겉보기에 그렇게 이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제대로 고른 게 맞을까, 누나를 믿어도 될까. 그런 꼬리를 무는 생각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시 벗어 옷장에 넣고 침대에 벌렁 나자빠졌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