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날이 좋은 토요일이 찾아왔다.
해나와 단둘이 일터도 학교도 아닌 곳에서 만나기까지 고작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전에 내게는 거쳐야 할 고비가 있었다. 그건 기대감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꽤 있는 숙제였다. 말하자면 우울함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금요일. 등교하자마자 평소와 똑같이 규진이에게 인사했다. 규진이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 주긴 했는데 어딘가 고까운 듯한 기색이 보이는 듯했다. 그건 지금 처음 인지한 것이 아니라 어제부터 느낀 거였다. 정확히 말하면 운동회가 끝나고 친구들을 뒤로한 채 해나를 보러 간 이후일 것이다.
나랑 해나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아직 친구들에게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운동회 날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해나를 데리고 둘만 대화를 하러 간 것도, 최소한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소문이 퍼진 기미가 없었다. 그래도 규진이는 나에게 어떤 불만이 있어 보였다. 대놓고 그런 걸 들먹이지는 않으니 그저 넘겨짚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해나와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그냥 삼키고 함구할 수도 있었다. 잠깐 그런 유혹에 빠지기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날 일이었다. 끝까지 숨길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런 짓을 해선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숙제를 마치기로 했다. 그날 오후에는 친구 넷이 모두 모였다. 나, 민욱이, 세찬이, 규진이. 규진이와 나는 같은 반이었으니 따로 조용히 불러 얘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말하기로 했다. 우리는 겨우 넷이었지만 말이라는 건 한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곡해되어 전달될 수 있었다. 나중에 다른 목소리로 전해 듣게 만드는 것보다 허심탄회하게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더 편했다.
"나 해나랑 음악 공연 보러 가기로 했어."
그 말을 필두로 해나와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다들 상당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다른 것보다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해나와 관련된 일로 몇 번 크고 작게 갈등이 있었으면서도 내가 정말로 그럴 배짱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듯.
"너 걔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며. 말은 그렇게 해놓고 이러냐? 나만 바보된 거야?"
예상대로 규진이가 상당히 열 받은 내색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해명이었고 사과였지만 규진이에게는 기만으로 들린 것 같았다. 규진이가 인상을 한층 더 구기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뒤에서는 둘이서 히히덕대면서 사람 바보로 봤던 거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규진이의 입에서 그만큼 원색적인 표현이 나오자 옆에서 지켜보던 민욱이와 세찬이도 조금씩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는 듯했다. 세찬이가 규진이에게 한발 다가가 너무 화내지는 말라고 달랬다.
"지금까지는 다 너희가 봐온 대로야. 그냥 내가 하루 눈 딱 감고 저지른 게 이렇게 됐을 뿐이고."
"뭐가 어쨌든 그거 자체가 문제라니까!"
결국 규진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나는 친구들을 한 번 둘러봤다. 어지간하면 다들 똑같이 친하게 지내온 우리들이지만 민욱이와 세찬이도 대놓고 비난하지 않을 뿐 내 행동을 그리 긍정적으로 보진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슴 한 켠이 아찔해졌다. 그래도 다시 진정하려 애썼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어. 애초에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규진아. 난 네가 이렇게까지 나와야 되는지 모르겠다. 네가 해나를 싫어하는 건 아는데, 솔직히 넌 걔랑 얘기도 해본 적 없잖아. 걔 나쁜 애 아니야. 제발 오해 좀 그만해주면 안 되냐."
"시끄러워. 그런 애 한두 번 보는 것 같아? 그래, 너야 잘 풀렸으니까 신나겠지. 무시당하는 입장은 생각해본 적 없어? 네가 이런 식으로 사람 기만할 줄은 몰랐다."
끝까지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늘어놓은 규진이는 그대로 내게서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당황한 세찬이는 나와 규진이 양쪽을 번갈아 보다가 규진이를 쫓아갔다. 민욱이도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민욱이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야…… 어떡할 거야? 규진이 진짜 화 단단히 난 것 같은데."
민욱이의 말을 조금 들으니 내가 운동회 날 해나를 불러 세운 일에 대한 말이 알음알음 돌긴 했다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파다한 소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긴 그날 해나와 함께 있던 애들이 꽤 됐으니 안 그렇다면 이상할 것이다. 민욱이는 그래서 기회를 봐서 나한테 넌지시 그 일을 물어볼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대뜸 내가 이런 식으로 저질러서 놀랐다고 한다.
"어쩔 수 없지. 각오하고 한 일이야. 생각보다 화를 더 많이 내긴 하지만."
그러자 민욱이가 물끄러미 나를 본다.
"진짜 내일 걔 만나러 나갈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민욱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건 안 물어볼 수가 없는데…… 규진이는 버릴 거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네가 이해나 포기 안 하면 규진이 화가 풀릴 리가 없잖아."
결국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죽을 만큼 고민하고 여기에 이르는 선택을 한 거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니. 나는 애시당초 이 문제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여겼고 그 생각대로 행동했다.
"정말로 규진이가 해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거야. 지금은 화를 내더라도 분명히 나중에는 오해를 풀어줄 거라고 생각해."
"진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친구면 그렇겠지."
듣기에 따라서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는 말이었다. 그쯤 되자 민욱이도 내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제대로 확인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래.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잘 해봐라."
슬슬 다음 수업이 시작할 때가 되어 우리는 각자 교실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날이 좋은 토요일이 찾아왔다.
여름방학, 한 달 내내 같이 일을 할 무렵 해나와 나는 종종 같이 나란히 걸어 귀가하곤 했다. 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파도 소리가 잦아들 무렵에 길이 갈려 헤어져 들어가곤 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서로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차점이라서. 늘 헤어지던 장소가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