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29화

하나씩 지워졌다. 필요한 것만 남을 때까지.

by 하이드

오후 여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각. 나는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막 불이 켜진 가로등 밑에서 서성거리며 해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괜히 나 혼자 너무 일찍 나온 건 아닌가 하는 초조함도 약간 스쳤다. 괜한 걱정이긴 했다. 내가 다소 일찍 나왔을 뿐 아직 약속 시간 까지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막길을 걸어오는 해나의 얼굴이 보였다. 해나는 내가 먼저 나와 있을 것을 예상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아, 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해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대더니 나를 빤히 봤다. 그러자 오늘 내가 입고 나온 새 옷이 의식됐다. 옷가게나 집에서 입어본 걸 제외하면 제대로 걸치고 외출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아직까지도 이게 나한테 어울리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해나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툭 뱉었다.


"옷 멋있네? 얼른 가자."


그러고는 내게 손짓하며 길 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그대로 서 있다가 버스 타러 가자는 소리라는 걸 깨닫고 부리나케 따라 나섰다.


목적지는 방학 때 일했던 시내의 문화 센터에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실내 공연장이었다. 여기에서도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다. 여름에 비하면 확연하게 짧아진 해를 느끼며 해나와 함께 걸었다. 전에 이 길을 같이 걸었을 땐 대화를 나누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유 모를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심지어 해나도 말을 길게 걸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릭락말락 전해져 온다.


공교롭게도 정류장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떨어진 채 내리기 시작한 노을을 바라봤다. 어제 친구들과 있었던 일과 지금 당장의 고민이 바람에 실린 소금기에 반죽처럼 녹아들 때쯤 옆에서 해나가 입을 열었다. 묘하게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너는 이런 공연 자주 가 봤어?"


정답이 확실히 있는 질문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해나가 나를 돌아봤다. 내가 그런 답변을 할 줄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눈으로.


"익숙한 거 아니었어?"


"아닌데. 아빠가 공짜로 얻어다 준 티켓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도. 난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자주 있었을 줄 알았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하지만 어쩌랴. 안 가본 게 사실인 것을. 내가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해나도 웃었다. 어딘가 허탈해 보이는 웃음이라는 게 차이점이지만.


"난 또. 나만 처음인 줄 알았잖아."


"내가 그런 취미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일 줄은 몰랐네."


"그래? 난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칭찬으로 들어도 될지 애매했다. 일단은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금 엉뚱하게 오고 간 대화였지만 뜻 모르게 우리 사이에 감돌던 단단한 공기가 풀어진 것 같았다. 원래 처음 만났을 때의 해나는 이랬지.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시내 방향으로 가는 버스였기에 사람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내 눈에는 여유롭게만 비춰졌다. 여름 성수기 관광객이 사라진 지가 몇 주 밖에 안 됐다. 늘상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뭉텅 줄어들었으니 텅 비어 보이는 게 당연하다. 내가 먼저 오르고, 해나가 뒤따랐다. 엔진이 고양이처럼 가르랑대자 버스가 출발했다.


"공연에 누가 나오는 거야?"


"유명한 사람은 안 나오더라. 검색해보긴 했는데 누군지도 모르겠어. 무슨 밴드가 나오던데."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떤 밴드야?"


"전자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주로 사용하는 스페이스 록 그룹이라고 하던가……."


물론 내가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검색 결과를 대강 읊은 것뿐이었다. 해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재밌겠다"라고만 중얼거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자 공연장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렇게까지 생소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리 익숙하다고도 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이 근방을 지나다니며 여기에 이런 공연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으나 여기서 뭘 하든 실제로 볼 날은 안 올 거라 생각해 곁눈질로 흘려오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웅성이는 공연장 입구로 들어갈 때는 무척 낯설었다.


"우리 자리는 저쪽이지?"


"응, 맞아."


어둑하고 부산스러운 공연장을 더듬어가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소간의 긴장과 함께 내가 이런 곳에 앉아 있다는 것에 신기함마저 느끼고 있는 사이 무대가 밝아지며 첫 번째 팀이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곧 실내에 단정한 피아노 음이 메아리치며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음악들보다는 몽환적이고 고요한 음악들이 주로 연주되는 공연이었다. 사전에 찾아봤던 정보들로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음악을 공연장까지 와서 접해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여러모로 낯설었다. 처음에는 약간 당혹스럽게까지 느껴지다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은은한 음율과 조명이 함께 춤추는 작은 공연장 안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우주선 같았다. 점차 많은 것이 하나씩 지워졌다. 필요한 것만 남을 때까지. 마침내는 밤의 파도 사이로 내던져져 함께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으레 기대할 만한 음악들은 아니다 보니 해나가 지루해할까 걱정됐다. 옆을 돌아보자 그건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해나는 나보다도 몰입한 얼굴로 손까지 맞잡은 채 정신없이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겪을수록 새로운 면모가 가득한 아이였다. 처음엔 단순히 활달하고 밝은 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내면은 투명하면서도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미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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