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30화

세상에는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다는 걸

by 하이드

음악은 계속되었다.


두 시간의 공연이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나도 해나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생기고 나서야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도 그리 덥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오자 목덜미에 와닿는 밤공기는 굉장히 시원했다. 단번에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옆을 보자 해나도 똑같이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마 머릿속도 나와 똑같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긴 대화는 없이 밖으로 나온 우리는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올 때와 똑같은 길을 되돌아와 출발 지점에 섰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자 언뜻 몇 시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여러가지가 달라졌다. 이미 서쪽으로 넘어간 태양도, 소금 알갱이처럼 떠오른 별도, 우리 둘의 거리도.


"좀 걸을까?"


집으로 가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철썩이는 소리만이 가득한 해수욕장 근처를 끼고 도는 길이었다. 해나가 양 주먹을 얼굴 근처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되게 좋았어."


"어떤 점이?"


"공연장 분위기도 좋고, 음악도 좋았어. 그런 건 처음이라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지 뭐야."


아까는 마냥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더니. 속으로는 불안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


"뭐가?"


"그런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들 말이야. 자기가 직접 만든 음악들을 모두가 보고 있는 곳에서 연주하고. 자기 내면을 남들에게 펼쳐 보여주는 거잖아."


"그러네. 생각이라는 건 꼭 말로만 전해지는 것만은 아닌가봐."


"그렇지…… 그런 걸 남들이 좋아해 줄 거라고 믿고 펼치는 것도 대단해. 나라면 못할 텐데."


"너도 남들한테 못 보여주는 것들이 있어?"


해나는 한동안 조용한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날 즈음에 해나가 다시 말했다.


"문화 센터에서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가 속이 깊은 애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한테 관심을 보였던 거야."


'관심을 보였다'는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도 앞섰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난 그냥 매일 바보 같은 짓만 하고 사느라……."


"나도야. 나도 내가 바보 같아. 근데 넌 네 속에 있는 걸 나한테 보여 줬잖아. 옥상까지 무거운 비치 의자를 옮기고, 내 다이어리에 뭐가 적혔는지 물어보고, 공연도 같이 보러 오자고 했어."


해나는 잠깐 말이 없었다.


"개학 날 방송 때 읊었던 시 말이야. 남들이 듣고 감명을 받아줬으면 했어. 실은 고르고 골랐던 거였어. 그런데 다들 그렇게 감성적이냐고 놀리는 걸 들으면서 엄청 분했어. 겉으로는 웃어 넘기는 척했지만 속은 아니었거든."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어떻게 짐작인들 했겠는가. 그저 보이는 게 전부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해나를 빤히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래서 그 시는 네가 쓴 게 맞았던 거야?"


해나는 기가 찬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날 봤다.


"그게 진짜 궁금해?"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아서, 살짝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다이어리도."


해나는 허리를 숙이며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전에도 저런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내 웃음을 그친 해나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치우며 말했다.


"진지하게 한 번 고민해볼게."


안에 든 것을 털어놓을 용기라. 그런 말을 되뇌이고 있으니 왠지 씁쓸해졌다. 해나는 모를 것이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친구들과 무슨 일을 겪었는지. 해나는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대화의 흐름 때문일까. 나는 해나도 그걸 알아야 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 숨기는 것 없이 얘기했다. 내 친구들, 특히 규진이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해나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무 신경 쓰진 마. 우리끼리 일이니까. 지금 너한테 말해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한데…… 그냥 알아만 두라는 뜻이었어.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마. 내 친구들 원래 다 단순해서 그러다가 금방 아무 일 없이 같이 놀게 되거든."


뜻밖에도 해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에 대한 오해가 있으면 내가 풀어야지. 너한테 확실히 말할게. 교문 앞에 찾아온 그 남자애들은 전에 설명했던 대로 친구의 남자친구랑 걔네 친구들이야. 착한 애들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역시 못된 짓 하고 다녔구나."


그러고는 우리 눈이 마주쳤다.


"걔는 나랑 같은 반 지은이라는 친구야. 고등학교 올라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 좀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같이 다녔어. 그런데 네 말을 들어보니까 역시 안 되겠네. 그 남자애랑 헤어지라고 확실히 말해야 겠어. 그래도 말을 안 듣는다면…… 내가 걔랑 절교해야지."


나는 그 말에 도리어 당황해서 얼른 말했다.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해나의 입에서 나오는 갑작스런 말에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해나는 이미 결심한 듯 고개를 저었다.


"꼭 너 때문만은 아니야.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거든. 그리고 그 규진이라는 친구한테는 너랑 같이 가서 얘기해 줄게. 나 때문에 친구끼리 싸우면 안 되잖아. 내가 직접 가서 얘기하면 분명히 오해도 풀어줄 거야."


한 번 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해나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나는 하려던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몇 걸음 더 걸어가던 중에 문득 왼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뭔가가 손끝에 닿았다.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 감각에는 말로 하려면 한참은 걸릴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다는 걸 지금까지는 모르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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