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5화

지금은 멀어지는 때다.

by 하이드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는 걸 좋아했지만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도 노곤함이 더 밀려왔다. 덥기도 했고. 관광객들 틈바구니에 파묻히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걷는 걸 좋아해도 가끔은 다리를 쉬게 만들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내 발에 의존한다면 30분은 걸리는 거리인데, 바퀴에 몸을 맡기니 절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금방 도착했다. 길 건너 상가 건물 몇 채와 작달막한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10층이 조금 넘는 아파트 창문들에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종일 일하느라 배가 고팠던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단지 입구의 정자 하나를 지날 무렵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윤승연!"


눈 감고도 누군지 대번에 알아맞힐 자신이 있는 목소리였다. 다만 여기서 마주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목소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몇 초 동안 발걸음과 함께 보도블록을 탁탁 때리는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새꺄, 누나가 부르는데 대답을 해야 될 거 아니야!"


내 뒤통수를 때리는 손길 역시 너무나 익숙한 감각. 투덜대며 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사촌누나 박수진이 버티고 서 있었다. 참으로 낯설게도 오른쪽 겨드랑이엔 목발 하나를 끼운 채. 그것이 바닥을 치던 둔탁한 소리의 정체였다.


"그냥 더 빨리 걸을 걸 그랬네. 못 따라오게."


"넌 발목 다친 누나가 불쌍하지도 않니?"


"완전 생생해서 뒤통수도 잘만 때리는 구만 불쌍하긴 뭐가……."


아닌 게 아니라 누나를 여기서 마주친 게 신통하다. 그야 평소라면 이상할 게 없는 일이긴 했다. 누나와 나는 어릴 때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그 덕에 우리가 친남매 못지않게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거니까. 하지만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한 지 이제 2주도 되지 않았기에 여기서 우연히 마주칠 거란 예상 자체를 못했다.


"누가 놀러 나온 줄 아니? 심부름 나온 거지. 봐."


누나는 툴툴대며 왼손에 든 흰 봉투를 들어올린다. 봉투에 새겨진 익숙한 로고와 그 안에 든 삼겹살 한 근. 나도 잘 알고 있는 요 앞 정육점에서 사온 거였다.


"이모도 여전하시네."


"내 말이.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딸한테 이런 심부름이 말이 되니?"


"그러게 술 좀 적당히 먹지……."


나의 그 말이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손이 올라가는 누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목발 탓에 얼른 쫓아올 수 없었던 누나는 분한 표정만 지었다. 고소하군.


실랑이는 그 정도였다. 어느새 우리는 익숙하게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누나의 보조에 맞추느라 걷는 속도는 퍽 느렸다. 평생 같이 자란 누나가 대학생이 되어서 훌쩍 떠나자 조금 어색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잠깐만 같이 있으면 다시 이렇게 편안하게 돌아온다.


누나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일은 어때?"


"할 만하던데. 무거운 거 옮길 때도 있고, 가끔씩 수업 중에 냄비 같은 거 쏟아서 정신 없을 때도 있긴 한데 별로 특별히 어려운 건 없어."


"그래, 그렇지? 아, 진짜 좋은 알바인데 내가 소개해주고 정작 내가 못 하게 되다니 어이가 없다니까. 이 발목 다 나으면 방학도 끝날 텐데. 꼼짝 없이 집에만 갇혀 있게 생겼잖아. 이번엔 학기 중에 뭐라도 일을 해야지. 어쩔 수 없네……"


그 말은 진심인지 누나는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부지런히 걸어왔는데도 느린 걸음 탓에 집까지는 거리가 남았다. 나는 왠지 오늘 일터에서 있었던 일을 누나에게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처음엔 좀 우물쭈물했지만 곧 이게 숨길 일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 옥상에 대해 차근차근 말을 풀어 놓았다. 옥상과 파라솔, 의자, 음료수와 해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 들은 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누나 표정이다.


"돈 벌라고 보내 놨더니 청춘 드라마를 찍고 있네. 부럽다, 야."


"내 말이 어떻게 그런 소리가 되는데?"


"여태 열심히 자랑해놓고 이제 와서 내숭이니?"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건데, 이게 어떻게 내숭이 된다는 거야? 역시 누나한테는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었다고 뒤늦게 후회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럼에도 누나는 계속 옆에서 잘해보라는 둥 지분대고 있었다. 그나마 금방 길이 갈려 헤어지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까지 누나가 하는 말에는 성의 없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조금씩 기울어지던 태양은 어느 순간에 이르자 놀랄 만큼 빠르게 뒷산 아래로 시선을 감췄다. 어느새 반대쪽 하늘 끄트머리가 남청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뒤덮일 때까지는 몇 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들어 가라는 인사를 하면서도 목발 때문에 시야에서 한참을 사라지지 않고 미적대는 누나의 모습이 얄밉다.


누나는 내가 해나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 건 아니다. 만약 맞더라도 문제다. 그 애가 나를 똑같이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 해나는 나랑 다른 부류였다. 잠시 같이 일하게 됐으니 적당히 어울려주는 것뿐. 예쁘고, 친구도 많고, 아르바이트 경험도 많았다. 반면 나는 친한 친구도 서넛 정도에 불과한 데다 평생을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하며 살았다. 취미라고 해봐야 그 적은 친구들과 가끔 운동을 하거나, 틈날 때 책이나 몇 권 읽는 정도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게 나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이런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유독 내가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다가오고. 내 마음은 마치 달의 인력에 휘둘리는 파도 같았다.


지금은 멀어지는 때다.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어봤다. 적당히 둘러대며 이미 차려져 있는 식탁으로 걸어갔다. 누나랑 얘기하느라 잠깐 잊고 있었지만 배가 많이 고팠다. 아빠도 이미 퇴근해 먼저 식사를 마친 때였기에 혼자서 조금 식은 저녁밥을 먹게 되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재게 숟가락을 놀렸다.


금방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한두 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거실로 나오니 엄마는 이미 잠을 청하러 들어가고 없었다. 아빠만 남아서 탁자 위에 잡지 몇 권을 올려놓고 찬찬히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읽고 계셨다. 나는 큰 흥미는 없었지만 그 잡지들 중 하나를 집어 후루룩 훑어봤다. 환경 파괴와 동물에 대한 이모저모를 다룬 특집 잡지였다. 아빠가 집에다 잡지를 이렇게 많이 늘어놓고, 그걸 본 내가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의 직업이 잡지사 부장이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아빠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익숙했다.


내가 방에서 나와 잡지를 뒤적거리는 것을 보자 아빠는 날 보며 웃었다. 아빠는 온화한 사람이어서 본래 웃음을 잘 지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얌전한 성격이었다 보니 가끔 가다 한 번 큰 잘못을 할 때가 아니면 아빠가 화를 내는 걸 보는 일은 드물었다.


"일하는 건 어때? 힘들지는 않던?"


"그냥 별거 없어. 힘들 때도 있긴 한데 할 만해."


"그래. 다행이네. 방학이기도 하니까 한 번 정도 경험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지. 네 손으로 용돈도 벌 수 있고. 대신 공부도 제대로 해야 된다."


"알았어."


상어와 기후에 관련된 잡지 기사를 조금 읽다가 책장을 덮고 밀어 놓았다. 잡지는 익숙한 물건이었지만 그게 곧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어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데면데면한 친구 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월급 타면 뭐 살 거냐?"


나는 짧게 침묵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제 3주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월급날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뭘 살 거냐는 질문을 듣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그다지 가지고 싶은 게 없어서였다.


주 6일, 수업 스케줄에 따라 유동적인 파트타임 근무였기에 120만원 정도를 받을 거라고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용돈이 그만큼이나 생긴다는 건 솔직히 좀 얼떨떨하다. 어떻게 쓰냐고 물어봐야 치킨이나 먹고 싶은 만큼 신나게 시켜먹는 일보다 나은 게 안 떠올랐다.


"저축이나 할까?"


그래서 그런 애매한 대답을 했더니 아빠는 허허 웃는다.


"원 자식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돈은 모아두면 좋은 거잖아."


"그래도 아빠는 네가 갑자기 알바를 한다길래 사고 싶은 거라도 있는 줄 알았지."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막연하게 아르바이트란 뭔가 어른들이 할 법한 멋진 일처럼 들려서, 그래서 분식집에서 누나를 만난 그날 누나에게 충동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저 막연한 기분이었다. 진짜로 그 말이 이뤄질 거란 확신도 없었다.


문득 해나는 월급을 타면 쓸 계획을 어떻게 정해 놨는지 궁금해졌다. 지난번에 얼핏 물어봤을 땐 옷 같은 걸 산다고 했었지. 성격상 거짓말처럼 들리지도 않았고, 그게 전부일지도 몰랐지만 최소한 아무런 생각도 없는 나보다는 낫게 들렸다. 딱히 욕심 같은 것도 없이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나와는 달리 앞으로 뭘 할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


"맞다. 너 이런 데 좀 가볼래?"


내가 말을 안 하고 있자 다시 잡지 위로 시선을 돌렸던 아빠가 돌연 주머니를 뒤적댔다. 그러더니 웬 종이 두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받아 들고 보니 그냥 종이가 아니라 지역 소규모 음악 공연 입장 티켓이었다. 날짜는 8월말 즈음. 장소는 우리집에서도 걸어서 3, 4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지역 홍보차 개최하는 축제라더라. 다음호에 우리 도시의 즐길 거리 관련 기사를 실을 예정이라 그쪽 홍보처에서 공짜로 티켓을 몇 장 줬거든. 생각 있으면 친구랑 한 번 다녀와봐라."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티켓을 챙겼다.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원래 난 이런 것에 흥미를 보인 적이 없었다. 말마따나 정 심심하면 친구랑 가볼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시시각각 밤이 깊어 갔다. 아빠와 함께 거실에 얼마간 더 같이 있었다. 그러다 한 번 오늘 일하면서 있었던 일을 꺼내 볼까 하다가 곧바로 그만뒀다. 누나한테는 비교적 쉽게 나왔던 말이었지만 어째선지 아빠에게는 그런 걸 털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하면서 매일같이 이른 시각에 시내까지 나가 일하는 것을 전혀 싫어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싫어하지 않긴커녕 기꺼울 정도였다. 어제 옥상에 만들었던 공간을 떠오르니 괜시리 즐겁기까지 했다. 그건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상당히 근사하게 다가왔다.


해나와 같이 일하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동갑내기가 아닌 몇 살 위의 어른과 함께였다면 업무 자체의 난이도를 떠나 지금처럼 편하게 하루를 보내지는 못했을 테니까. 원래는 누나가 같이 있어줬을 테지만, 누나는 황당한 이유로 일을 못 나오게 되어버렸다. 해나 입장에서도 나라는 비교적 편한 사람이 있으니까 잘 대해주는 것일 테고 말이다.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긴 어려웠겠지.


째깍, 째깍. 시간은 잘 흘러갔다. 오늘은 오후 1시 즈음에 업무가 끝나는 날이었다. 이후로는 도우미가 필요 없는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나와 해나는 오늘도 일이 끝나자 옥상으로 같이 올라갔다. 어제와 다른 점은 센터 건물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하나씩 사 들고 올라갔다는 점이었다.


파라솔 아래 펼쳐진 그늘에 여유롭게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갈 곳이 애매할 때 시간을 보내거나 잠깐 쉬었다 가는 장소로 애용하게 될 듯했다. 한여름의 날씨는 더웠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버틸 만했으니 숨 돌릴 장소로는 충분히 괜찮았다.


다 먹고, 시원한 음료수 한 캔씩 비우고, 그러면서 잡담도 나눈 후 우리는 다시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계단을 타고 2층을 지날 때였다. 1호 강의실 수업이 끝났는지 웅성이며 나가는 사람들이 복도에 들어찼다. 좀 복잡해 보여 사람이 빠지고 나서 나갈 심산으로 잠시 기다렸다. 사람들이 어느정도 줄어들 무렵, 별안간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소년이 있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지만 확실히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잘 아는 녀석이었다. 내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이민욱. 여기에서 마주칠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인가 알아보는 게 늦었다.


"야, 뭐야? 윤승연! 여기서 뭐해?"


민욱이가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런데 몇 걸음 오다가 나랑 자연스럽게 같이 있는 해나를 보고는 멈칫하는 것이다. 대놓고 나와 해나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자 머릿속이 대강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예상이 됐다. 내가 이런 여자애랑 같이 있으니 무슨 일인가 하는 거겠지. 나 역시 당혹스러운 감정이 적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딘가 우쭐한 마음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민욱이를 멋쩍게 돌아보며 질문에 대답했다.


"나 여름방학에 알바할 거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아, 그게 여기였어? 난 몰랐네."


분명 몇 번씩 제대로 말했는데도 저런 반응이나 하고 있다니 평소 내 말을 어디로 듣고 사는지 모를 녀석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여긴 왜 왔어? 뭐 배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민욱이가 나온 1호 강의실을 슬쩍 들여다봤다. 이 시각에 저기서 뭘 가르친다고 하더라?


"나도 말한 적 있을 텐데? 방학에 여기서 통기타 가르쳐 준다길래 계속 나오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민욱이는 내 옆에 있는 해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나는 살짝 소심한 태도가 되어서 간단하게 해나를 소개해줬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게 된 동갑내기고 우리랑 같은 학교 다닌다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것까진 좋았는데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런 상황은 그리 견디고 싶지 않았는지 해나는 금방 내게 다음에 보자는 말을 건네고 종종대며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민욱이가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너 쟤랑 친해?"


"그럴걸."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민욱이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왠지 그런 대답 밖에는 안 나왔다. 그야 매일 얼굴 보고, 서로 잘 웃기도 하고, 옥상에 올라가서 밥도 같이 먹긴 했다. 근데 결국 한 달 남짓한 아르바이트. 언제까지 그런 관계가 유지될지는 몰랐다. 애초에 여기서 만나기 전에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면서 얼굴도 마주친 적 없지 않았나. 그냥 어차피 종일 얼굴을 봐야 되는 사이니까,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어 잘 대해주는 거겠지.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면 해나는 나를 어떻게 대할까? 눈이 마주쳐도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가지 않을까? 거기까지는 지나친 생각이라도 지금과 같은 관계가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어쩌다 길이 겹쳐 마주친다면 간단한 인사 정도. 그 뿐이겠지. 다른 용건 없이 만나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상상이 안 갔다.


"너는 쟤 누구인지 알아?"


"우리 학교 방송부 하는 애 아니야? 학기초에 잠깐 유명했잖아. 거기 경쟁률이 높아서 1학년 중엔 몇 명 들어가지도 못했으니까."


"그랬나."


나는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나랑 같이 놀러 다니는 친구들 중에서 민욱이는 그런 소식에 비교적 빠삭한 편이었다. 여기저기서 도는 소문들을 듣고 옮기기도 잘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좀 뻣뻣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이 나랑 해나랑 같이 있었다고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너 다른 애들한테 이상한 말 하고 다니지 마라."


"무슨 소리야?"


"나랑 아까 걔랑…… 뭐 이상하게 묶는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네 입으로 별로 친하지도 않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너 쟤한테 관심 있어?"


그렇게 말하는 민욱이가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웃길래, 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을 할 즈음에 우리는 센터 건물 1층을 빠져나왔다. 한낮의 태양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어쨌든 하지 말라고. 알겠어?"


"뭔 소릴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래, 알겠다. 내가 너희 말고 어디 소문 낼 데나 있을 것 같아?"


가만히나 있을걸. 괜히 앞서 나가다 쓸데없는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다. 그래도 민욱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고, 늘 뭉쳐 다니는 무리에 속해 있었으니 저렇게 나오는 이상 자기가 한 말은 지킬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리고 민욱이는 그 믿음에 부응해 자신의 말을 지켰다. 정말로 우리 패거리 네 명한테만 그 말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전 04화파도의 집 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