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가면 안 되는 곳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딱 열흘이 지난 날이었다.
출근 시간보다 약간 빠르게 강의실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으니 몇 분 지나지 않아 해나가 도착했다. 일이 손에 익은 후로는 이런 게 일상이었다. 나랑 해나가 출근하면 잠시 후 매니저 형이 나타나 인사한다. 제대로 일을 시작하기까지는 잠깐의 여유가 생긴다. 그 동안은 해나와 둘이서 시답잖은 잡담이나 나누면서 시간을 때운다.
"오늘 첫 수업이 뭐더라?"
"쿠킹 클래스."
"아, 그거 좋아. 저기 맨 오른쪽 앉으시는 아줌마 되게 친절해."
벌써 얼굴 본 지가 열흘이었다. 완전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까워졌다. 그렇겠지. 아마도.
"말 잘하면 쿠키 굽고 남은 것도 얻어먹을 수 있어. 너도 먹어봤어?"
"난 그런 거 안 먹어."
"왜? 맛있는데."
그러자 해나는 멋쩍게 뺨을 긁었다.
"다이어트 때문에."
그다지 살이 찐 것 같지도 않은데 웬 다이어트? 여자들은 항상 그러더라. 1년 내내 다이어트 중이래. 누나만 해도 다이어트 한다면서 술은 끊지도 않잖아. 그런 말은 꿀꺽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해나가 말한 대로 첫 수업은 쿠킹 클래스였다. 그릇이나 밀대 등 이것저것 준비할 건 다른 수업에 비해 많지만 그래도 난 이 수업을 좋아했다. 늘 하던 대로 자리마다 도구들을 배치하자 곧 수강생이 우르르 들어왔다.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은 언제나처럼 뒷자리에서 대기하고, 강사가 들어와 수업을 진행했다. 시간이 지나자 강의실 안에 달콤한 공기가 포슬포슬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나오는 것이 반죽이나 밀가루 같은 게 넘쳐서 테이블을 더럽히는 거다. 그럴 때마다 달려가서 닦을 걸 대령하는 것도 우리 일이다. 젖은 행주를 들고 앞쪽 자리로 뛰어갔을 때에는 모퉁이 자리에 앉은 예쁜 대학생 누나가 돌아보면서 싱긋 웃어줬다.
다 끝나갈 때쯤엔 오늘도 수고한다고 수강생 몇 명이 쥐어 준 쿠키를 한두 봉지 받았다. 모양은 제멋대로긴 해도 맛은 괜찮다. 일도 어렵지 않고, 수강생들과도 알게 모르게 친해지고. 나는 이 센터가 점차 마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가능하다면 내년에도 여기서 다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받은 쿠키를 하나 꺼내 입에 던져 넣었다. 우물거리며 봉지를 해나에게 살짝 내밀었다. 너도 먹으라는 제안을 담아서. 해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이어트라. 내심으로는 쿠키 하나 정도는 먹어도 뭐가 문제인가 싶었지만 강요할 수도 없으니 순순히 내려놨다.
그때 매니저 형이 나를 불렀다.
"승연씨, 여기 쓰레기 나온 것들 모아 놨으니까 바깥에다 좀 버려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이번 수업에서 나온 쓰레기가 가득 든 봉지를 들어올렸다. 한 명이 충분히 들 만한 양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강의실을 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쓰레기장은 센터 건물 뒤편에 있었다. 얼른 내려가 쓰레기장에 봉지를 던진 뒤 손을 탁탁 털었다. 이후 올라오는 길에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복귀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동안 강의실 안에는 해나만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해나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나를 보고는 앉은 채로 펄쩍 뛰었다. 왜 저러지?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해나의 볼이 다람쥐처럼 불룩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는 내가 두고 나갔던 쿠키 봉지가 열린 채 올라가 있었다. 해나는 연신 우물거리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중이었다. 뭉개지는 발음은 대충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긴 했다.
"그게 미안할 건 없긴 한데……."
먹고 싶으면 그냥 줄 때 먹지. 몰래 먹을 것 까지야…….
해나는 아직도 입에 든 걸 삼키지 못하고 볼을 잔뜩 부풀린 채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얼굴이 빨개지며 점차 울상까지 되어갔다. 일단 예의상 고개를 돌려주긴 했는데 왠지 모를 웃음이 입가를 배시시 뚫고 나왔다.
그런 소소한 해프닝들이 있었지만 퇴근 시각이 된 시점에서 돌아보면 굴곡 없이 지나간 무난한 하루였다. 마지막 마무리까지 마치고 매니저 형에게 가보겠다는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나와 바닷가 길을 걸어서 귀가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 열흘간 그런 것이 일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강의실을 나오자 해나는 1층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다가섰다. 나는 의아해하며 해나의 이름을 불렀다.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옥상에 가보려고."
"왜?"
"그냥. 궁금해서 한 번쯤 올라가보고 싶었거든. 집에 급하게 갈 필요도 없잖아. 지금 떠오른 김에 가보려고."
정말 말 그대로 아무 의미가 없는 이유였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멀뚱하게 서 있자 해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씩 올리며 다시 말한다.
"승연이 너도 같이 가볼래?"
"나도?"
내가 굳이 따라 올라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안 갈 이유도 딱히 떠오르진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따라갈 마음이 동했다. 해나 말마따나 서둘러서 집에 가지 않아도 됐으니까. 가봤자 할 일도 딱히 없고.
그 사이에 해나는 이미 계단을 반 층 오르고 있었다. 꺾인 계단을 타고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도 첫 단을 밟았다. 순식간에 3층을 지나 옥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아보니 열려 있었다. 붙잡고 활짝 열어보니 해질녘 그림자에 반쯤 파묻혔던 계단참이 순식간에 햇빛으로 밝아졌다.
널찍한 옥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건물 면적과 동일한 밋밋한 콘크리트 바닥이 있었고, 바닥 끄트머리엔 내 가슴께쯤 되는 난간이 늘어섰다. 그 너머로 기울어진 햇빛을 받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건너다 보였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바깥을 보았다. 기껏해야 3층짜리 건물이니 한눈에 모든 것이 내려다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키 큰 건물들이 이쪽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왠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고향은 조금 낯선 곳에 왔다는 느낌을 주었다.
"해나…… 너 지금 뭐해?"
잠깐 눈을 돌린 사이 해나가 웬 사다리에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내 키보다 높은 사각형 구조물이었는데, 물탱크를 콘크리트로 감싼 것인 듯했다.
"이 위에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해서."
올라가면 안 되는 곳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도 잠시 우물거리다 뒤따라 올라갔다. 다 올라와서 허리를 펴자 가장자리 쪽에 선 해나가 양손으로 손차양을 한 채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혹시 나랑 비슷하게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있으려나.
해나가 말했다.
"여기 좋은데."
"경치는 괜찮은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 비밀장소 같은 것 하나 가지고 싶었어. 유치하긴 하지만 재미있잖아. 나 혼자 꾸민 내 공간."
그 말은 미묘하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연히 내 비밀 해변이 떠올랐다. 하지만 해나에게는 그 해변에 대해 말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긴 비밀장소라고 하기엔 좀 안 어울리지 않아? 아무나 올 수 있고, 탁 트였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물고 늘어져야 돼?"
나름대로 감상적인 말을 꺼냈는데, 내가 그리 대꾸하자 해나는 산통이 깨졌는지 살짝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딴전을 피웠다. 그러는 사이 해나는 머뭇거리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들었다. 나는 그게 뭔지 금방 알아보았다. 해나가 지난번에 뭔가를 쓰고 있던 다이어리였다. 화제도 돌릴 겸 그걸 가리키며 말을 걸어봤다.
"그건 뭐야?"
"뭐?"
해나는 좀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움찔하며 나를 봤다. 여태까지 같이 있었는데 왜 갑자기 놀라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다이어리 말이야."
"아, 이거…… 그냥 내가 쓰는 다이어리지. 이런 거 처음 봐?"
"그런 건 아니긴 한데……."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해나가 그걸 다루는 태도는 어딘가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굳이 이런 장소, 이런 타이밍에 꺼내 드는 것만 봐도 말이다. 이내 해나는 다이어리를 펼칠 듯 말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입술도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오물대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로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뭐야 대체.
미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가 되었다. 그걸 만회하고자 나는 다시 한 번 화제를 돌리는 걸 시도했다. 때마침 적절한 대화거리가 생각나기도 했다.
"있잖아. 여기다 파라솔 같은 걸 놓으면 어떨까?"
"파라솔?"
"아까 쓰레기장에 갔을 때 파라솔이 하나 버려져 있는 걸 봤거든. 요즘 점점 더워지니까 여기다 그걸 펼쳐 놓고 햇빛을 가리는 거야. 비밀장소까진 아니어도 가끔 올라와서 쉬다 갈 순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해나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조금 전에 보였던 약간 쌀쌀맞았던 태도는 이미 없었다.
"그걸 여기까지 가지고 올라온다고? 할 수 있겠어? 그보다 매니저 오빠가 허락을 해줄까?"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는 않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리고 뭐…… 허락을 안 해줄지도 모르지만 말 정도는 꺼내 볼 수 있잖아."
해나는 처음에 다소 허무맹랑한 소리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리 나쁘게 들리지 않았던 건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미있겠네. 캠핑하는 기분일 것 같아."
티는 안 냈지만 끝까지 황당한 소리 취급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전전긍긍하던 내 마음이 그 한 마디로 확 밝아졌다. 이젠 이 애랑 꽤나 많이 친해진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만 그날 헤어질 때까지 내 비밀 해변에 대한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평소보다 좀 더 일찍 문화센터로 출근했다. 어제 옥상에서 해나와 나눈 대화를 밤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라솔을 옥상에 올려놓는다면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하는 게 나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쓰레기로 버려진 파라솔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다. 다행히 오전 9시에 건물 뒤편 쓰레기장을 살펴봤을 때 어제 봐 둔 파라솔은 그대로 있었다.
그걸 확인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는 매니저 형을 마주쳤다. 형은 웃으며 오늘은 빨리 나왔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제 내 용건을 꺼낼 차례였는데 우습게도 그 순간 말이 막혔다. 이제까지는 분명 훌륭한 아이디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막상 어른 앞에서 그걸 입에 담으려니 왠지 바보 같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래도 그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그게 더 바보처럼 보일 듯했다. 그런 날 보는 매니저 형의 표정도 점점 의아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별수 없이 그 '훌륭한 아이디어'를 말해야 했다. 듣고 나서 다소 황당하다는 듯 웃음짓는 매니저 형을 보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후 나온 대답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정말요?"
"네. 원래 거긴 잘 쓰지도 않는 공간이라서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제가 말해 놓을게요. 근데 그 위까지 물건을 옮기는 건 힘들 텐데……"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부리나케 쓰레기장으로 달려갔다. 본격적으로 파라솔을 옮기기 전에 혹여나 고장이나 구멍이라도 난 곳은 없는지 살펴봤다. 다행히 조금 낡았다는 점만 빼면 멀쩡한 물건이었다. 바로 어깨에 들쳐 메고 옥상으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별로 무겁지 않게 느껴졌으나 3층짜리 건물의 옥상까지 그걸 옮기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매니저 형이 괜히 걱정한 게 아닌 셈이었다. 그래도 어찌 노력한 끝에 어제 해나와 함께 올라갔던 사각형 공간 위에 파라솔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파라솔을 활짝 펼치자 오전의 설익은 태양빛이 가려졌다. 그늘에 서서 땀을 식히고 있자 이게 뭐라고 굉장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간 그대로 있다 보니 문득 이제 수업이 시작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35분. 그늘을 뒤로하고 얼른 2층의 강의실로 내려갔다.
2호 강의실에 들어갈 때였다. 막 안에서 나오려던 해나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해나는 의아한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뭐야? 오늘 좀 늦었네?"
"아, 미안. 그게……."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해나는 이미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성큼 다가가 있었다. 우선 1층으로 가서 요리 수업에 쓸 냄비와 버너를 가지고 와야 되니 따라오라는 거였다. 내가 소심하게 뒤따르자 해나는 그제야 내 모습을 제대로 봤는지 이렇게 물어봤다.
"뭐야? 꼴이 왜 그래?"
그제야 나도 파라솔을 옥상까지 옮기느라 땀을 흘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내 상태를 깨달았다. 나는 우물거리며 조금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털어놓았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귀담아듣던 해나는,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나자 계단 중간에 멈춰 서더니 느닷없이 파안했다. 아예 배를 잡고 마구 웃어대던 것이다. 그 애를 알고서 처음 보는 모습에 나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아 진짜. 미친놈. 그걸 진짜 갖다 놨다고?"
"어제 얘기했잖아. 너도 좋아할 줄 알았지."
내가 그렇게 말하니 해나는 조금씩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얼굴에 웃음기가 남고 눈물까지 살짝 맺힌 채로 날 보며 말했다.
"응, 좋아. 재미있을 것 같아. 이따 같이 올라가보자."
이유는 몰랐지만, 그 말에 채찍 같은 파도를 눈앞에서 얻어맞은 듯 얼떨떨함이 밀려왔다. 그저 그 애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힘들었을 텐데. 나랑 같이 하지. 나한테는 말도 없이 그런 일을 다 하냐?"
"아니야. 괜찮아. 별로 힘들지도 않던데 뭐."
물론 수업 커리큘럼이 진행되는 근무 중에는 옥상 같은 곳에 올라갈 틈이 나지 않았다. 수업 사이사이에는 당연히 창고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옮겨야 되니까. 수업 중에는 강의실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긴 했지만 그게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업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처럼 요리 수업이 있는 날은 수업 중에도 뒤처리를 위해 행주나 빗자루를 들고 뛰어다닐 일이 잦았다. 오후에는 키즈 종이 공예 수업이 있었는데, 그거야 말로 통제 안 되는 어린이들이 사방에 색종이를 흩날려대기 일쑤였다. 굳이 하고자 한다면 잠깐 빠져나와 옥상에 올라갔다 오는 것 정도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까진 못 느꼈다. 점심 시간에는 센터 바깥에서 밥을 먹고 오니 여유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어쨌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오늘의 근무 시간도 그러했다. 캘리그라피 수업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정은 종료되었다. 뒷정리만 마치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퇴근뿐이었다.
혹시 아까 얘기한 걸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그런 심정으로 건너다보자 허리에 양손을 얹은 해나는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다만 이런 말을 꺼냈다.
"승연아, 너 먼저 올라가 있어. 난 잠깐 화장실 들렀다 갈게."
"알겠어."
저러고 그냥 집에 가버리는 건 아닌가. 솔직히 좀 불안하다. 애초에 내가 한 행동은 그저 바보처럼 보일 따름이었고 해나는 겉으로만 맞춰주는 척했던 걸지도 모른다. 사실 속으로는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거나…….
처음에는 설마 그러겠냐는 마음이었지만 옥상에 먼저 올라가 파라솔 아래 혼자 있으니 점점 더 내가 멍청하게 느껴진다. 금방 오겠다던 해나가 몇 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친근하게 대해줬더니 별 짓을 다 한다고 날 비웃으며 두고 간 거라면 어쩌지?
참으로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옥상에서 내려가기 직전이었다. 계단 쪽 문이 열리고 해나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안도를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해나가 척척 내가 있는 파라솔 방향으로 걸어오는데, 양팔에는 플라스틱 의자를 서너 개 겹쳐 들고 있다.
"이게 다 뭐야?"
"의자. 파라솔만 있으면 뭐해? 앉을 데가 있어야지. 직원 분한테 여쭤보니 갖다 써도 된다고 했어. 좀 받아 줄래?"
해나는 까치발을 들고 안고 있는 의자를 내가 있는 높은 곳으로 건넸다. 일단 받아 들어 내려놓는 사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해나.
"의자 가져오느라 늦은 거야? 말을 했으면 같이 들고 왔을 텐데."
"너도 나한테 말 안 하고 파라솔 올려 놨잖아. 같이 쓰려면 나도 일해야지."
전부터 느낀 거지만 얘는 좀 이상한 승부욕이 있었다.
"생각보다 좋다. 이렇게 하니까 꼭 놀러 온 것 같아!"
사다리를 다 올라온 해나는 보란듯이 세워져 있는 파라솔을 보고 가볍게 손뼉을 친다. 모순적이게도 관광지에 사는 우리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기분이기도 했다. 남들이 좋다고 찾아오는 바다, 해변이 너무 당연한 일상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그렇기에 크게 특별할 것 없는 공간에 이 정도의 변화만 있어도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각자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옆에서 해나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의자만 가져온 게 아니야. 자."
그러면서 주스 캔 하나를 던져 준다. 손을 들어 낚아채자 캔 표면의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착 감쌌다. 이어 해나가 주머니에서 자기가 마실 캔을 꺼내는 게 보였다. 그 캔을 손에 들고는 내 쪽으로 슥 내밀었다. 처음에는 무슨 의도인지 몰랐으나 이내 깨닫고 나도 캔을 건배하듯 툭 가져다 댔다.
한 모금. 목구멍을 넘어가는 시린 감각과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늘.
"덥긴 덥다."
"그래도 그늘 밑이라 버틸 만한데."
거기서 대화가 잠깐 끊어졌다. 여기서 해변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다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앞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이다 한 캔을 다 비울 즈음엔 해나도 주스를 다 마신 채였다. 손에는 캔이 아닌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분주히 화면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아하니 또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가 싶었다. 둘만 있는데, 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네.
"있잖아, 승연아."
"응?"
잠깐 넋 놓고 있다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살짝 허둥대며 대답했다. 어느새 해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평소에 책 같은 거 많이 읽어?"
"좀 읽기는 하는데……."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자 나는 머뭇거렸다. 뜬금없이 그런 걸 묻는 의도가 뭔지 헤아려보려는 시도였다. 그런 와중 해나가 다시 말했다.
"혹시 시집 같은 것도 읽어?"
물론 나는 책을 그럭저럭 읽는 편이다. 시집도 읽기는 하는데 많이는 아니고 가끔 읽는다. 문득 저번에 학교 쉬는 시간에 아무렇게나 끄적여 본 시를 친구 한 놈이 읽더니 거진 일주일은 놀려 댔던 게 떠올랐다. 내가 봐도 엉망진창에 낯부끄러운 시긴 했지만 애당초 누구 보여주려고 쓴 것도 아닌데 얼마나 억울했는지.
왜 이런 때에 그런 기억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대답하기까지 걸린 짧은 시간 동안 하필이면 그런 추억이 떠올라서인지, 여기서 순순히 사실대로 말하면 왠지 해나가 나를 재미없는 샌님처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나는 친구가 많고 외향적인 아이기도 하니까 더욱. 돌이켜 보면 바보 같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책을 가끔 읽기는 하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평소에 쉴 때는 친구들이랑 게임이나 농구하면서 시간 보내는 경우가 많아."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느정도는 본심을 숨긴 말이긴 했지만.
"그래……."
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왠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영부영 옥상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태양이 조금씩 기울어가는 게 보였다. 누가 먼저 이만 집에 가자고 말을 꺼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려오는 동안 어느새 해나가 예의 그 다이어리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