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까지 가자 두 갈래 갈림길이 나왔다. 거기서 가는 방향이 갈렸다.
다음날. 누나가 차에 치였다.
그러니까 진짜로 차에 치였다.
처음 들었을 땐 당연히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하지만 제대로 소식을 들어보니 다행히도 천운이 따라 준 건지 경미한 발목 부상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 소식을 출근하고 나서야 들었다. 먼저 일을 시작하고 나서 이놈의 누나는 왜 아직까지 안 오나, 하는 생각을 품을 때 즈음이었다. 누나가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고 사실을 전했다. 처음엔 안 믿었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가 대뜸 전화하더니 차에 치였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쌩쌩한 목소리로. 누나 머리가 잘못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구체적인 사정을 듣고 나자 일단 병원에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자긴 정말 멀쩡하다면서, 굳이 안 와도 되니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런다고 진짜 그대로 따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누나 역시 여기서 일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매니저 형도 얼른 다녀오라고 허락해줬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나는 해나 쪽을 돌아봤다. 나 없으면 얘 혼자서만 남아서 일을 해야 될 테니까. 그러자 그 애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얼른 가보라고 말하며 선선히 웃어 주기도 했다. 나는 잠깐 그 미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고마워. 누나 괜찮다니까, 상태만 보고 금방 다시 올게."
"천천히 와도 돼.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지 뭐."
"으, 응, 그렇지. 그래도 빨리 올게. 미안해!"
세상엔 저런 미소도 있는 법이구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센터를 나와서 병원까지 갔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는 카운터에 물어 바로 병실을 찾아갔다. 3층 정형외과. 부리나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병실에 들어갔을 때 처음 보게 된 것은 누나의 머리 끄댕이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이모의 모습이었다. 다음에 또 술 먹고 이렇게 되면 가만 안 둔다는 이모의 으름장을 보아하니 이번 사고의 전말이 대강 추측이 갔다. 그러고 보면 어제도 약속 있다며 나만 두고 혼자 갔었다. 약속 자리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다 잔뜩 취해 들어오는 길에 변을 당한 모양이지.
보고 있자니 실랑이가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으니 다행스럽게도 이모가 날 발견했다.
"어머, 승연이 왔구나."
이모가 다소 어색하게 인사했다. 나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촌누나를 자주 보는 만큼이나 이모하고도 교류가 많아 익숙한 사이였다. 누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야, 윤승연. 안 와도 된다니까 또 꾸역꾸역 여길 오냐?"
"얘는 기껏 와준 애한테 한다는 말이 그게 뭐야?"
이모가 누나의 등짝을 쩍 소리 나게 때리자 누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프겠다. 이윽고 이모는 의사를 좀 만나고 오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누나 머리맡에 앉아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진짜로 완전 멀쩡해 보이긴 하네."
"그렇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일이나 열심히 하고 있으라니까."
술 먹다 차에 치인 사람이 뭐가 그리 잘났다고 거드름 피우는지. 그냥 바로 등 돌려서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병문안 온 거니까. 머리맡에 앉아 침대 밑에 놓인 과일이나 좀 깎았다. 누나는 이왕 입원한 김에 최대한 즐기고 가기로 결정하기라도 했는지 내가 깎는 과일을 족족 입에 집어넣었다.
"일 얘기 나와서 말인데. 누나 알바는 어떡해? 계속 일할 순 있어?"
"아, 그거. 좀 곤란해지긴 했어. 발목 좀 접질린 거긴 하지만 그래도 회복하려면 2, 3주는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더는 못 나갈 것 같은데."
사과를 하나 더 씹어 오물거리던 누나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위기를 기회로 삼으랬다고. 나 없는 사이에 해나랑 좀 친해져 봐. 매니저 오빠 빼면 둘만 일하는데."
"난 감정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자 누나는 뜬금없이 바람 새는 웃음을 지었다.
"얘 좀 봐? 같이 일하는데 친해져 보라는 게 이상한 말이니?"
"……."
순간 멋쩍어졌다. 그래서 신나서 떠들 준비를 하는 누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 입에 반쯤 깎은 사과를 그대로 욱여 넣어 버렸다. 이런 게 무슨 천사라고.
한참동안 입을 잔뜩 채운 사과를 씹던 누나가 간신히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막 나한테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누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가냐?"
"누나가 빨리 가서 일하라며."
"하여간 속도 좁아서는……."
저런 누나 걱정해준 내가 바보다. 나는 투덜거리며 인사도 건성건성 건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나가다가 마침 돌아오는 이모에게도 다시 일하러 가보겠다고 한 뒤, 계단을 타고 병원 로비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쨍하니 뜨거운 태양이 나를 반겨줬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짠내가 섞여 있었다.
다시 문화센터로 돌아왔을 때는 근무 시간이 절반쯤 지나가 있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이미 지나간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해야지.
강의실로 복귀하자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우리 같은 아르바이트생에겐 대기 시간. 언뜻 관찰해보니 종이 공예 같은 것을 배우는 수업인가보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강생들의 시선이 잠깐 나를 향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원래대로 돌아갔다. 해나는 강의실 뒤편에 얌전히 앉아서 평소처럼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데 그 애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왠지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야 되지? 원래 누나가 있을 땐 누나 옆자리에 앉으면 됐는데. 지금은 해나 바로 옆자리에 앉아도 되나?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떨어져서 앉으면 정 없어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그 애와의 거리는 야속하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은 내 고민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 앉을 때가 되어 결정을 내렸다. 해나가 앉은 곳에서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엉거주춤 앉았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뭔가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 옆에서 해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아, 다녀왔어?"
"응……."
"언니는 좀 어때?"
"괜찮대. 평소랑 똑같이 팔팔하더라. 근데 입원 중이라 다시 출근하기는 좀 힘든가봐."
"어머, 정말? 다행이긴 한데…… 다시 못 보겠구나."
해나는 누나랑 딱히 친하진 않았다. 사실상 친해질 기회조차 없었는데도 좀 유감스러워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긴 누나가 있어서 그나마 분위기가 좀 자연스럽긴 했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그렇다면 이제부턴 우리 둘이서만 같이 일해야 된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다. 여태 알고는 있었지만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정적. 해나의 시선이 다시 내게서 떨어졌다.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내가 용기를 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서.
"오늘 일은 어땠어?"
"그냥 평소랑 똑같았지."
"아, 그래?"
"응."
"……."
"……."
실패.
해나는 이제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흘깃거리며 살펴보니 며칠 전과는 달리 손톱이 눈에 띄게 화려해져 있었다. 네일아트 같은 걸 받은 건가? 잘은 모르지만 방학맞이로 했을지도 모른다.
나한테는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지.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수업은 금방 끝났다. 이제 일할 시간이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걸 만회할 심산으로 얼른 일어나 퇴장하는 수강생들한테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의욕적으로 강의 도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종이 공예 수업이라서 딱히 무거운 걸 옮길 필요는 없긴 했는데, 여기저기 흩날리는 종이 조각들을 치우는 건 좀 번거로웠다.
"내가 큰 건 다 치울게. 자잘한 것 정리만 좀 해줘."
해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그렇게 말하는 내 모습이 좀 멋있게 느껴졌다.
"아니야. 네가 놀다 온 것도 아닌데 뭘."
내가 처음에 느꼈던 해나의 첫인상은 별로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쉬운 일만 하는 걸 지는 걸로 여기는지, 내가 의욕적으로 일하는 만큼 그 애도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서로 경쟁하는 꼴이 되어 강의실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가 뭘 해야 이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마지막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이었다. 해나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 내 위치가 더 가까운 것 같아서 당연히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나보다 반 박자 빠르게 해나가 먼저 그 종이를 잡아버렸다. 결과적으로 의도는 없었지만 해나가 집은 종이를 내가 빼앗은 모양새였다.
몇 초 후, 내가 보게 된 것은 해나가 종이에 손끝을 베어 피를 흘리는 모습이었다. 기껏해야 종이라고는 해도 의외로 꽤 깊게 베였는지, 금세 피가 검지를 타고 주륵 흘렀다.
"미안!"
"아니야, 괜찮아. 별로 안 아파."
그렇게 말한 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심한 상처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 모습은 내 죄책감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어쨌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계속 움직여야 했다. 다음 수업 세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강생들이 다시 입장했다.
강의실 뒤에 앉아 있는 중에도 계속 해나의 손가락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종이에 손끝을 베이다니. 세상에서 제일 소름 끼치는 일 중 하나 아닌가.
한동안 해나를 곁눈질로 관찰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강사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줄어들고 수강생들이 실습을 시작하며 두런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눈치 보기를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해나의 눈빛이 슬쩍 내 걸음을 따라오긴 했지만 어디 가냐고 묻지는 않았다.
몇 분 후,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손에는 상처 연고 하나와 반창고 상자가 들려 있었다. 1층 사무실에서 얻어온 거다. 그걸 들고 해나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다.
"약 가져왔어. 상처 한 번 보여줘."
"안 이래도 되는데. 난 괜찮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나는 머뭇머뭇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꼼꼼히 연고를 발라주고, 그 위에 반창고를 감아줬다. 따뜻하다. 작다. 이런 손도 있는 법이구나.
별로 힘들지는 않은 일이라도 셋이 하던 일을 둘이 하려니 은근히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원수 같은 누나 같으니.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오늘은 예상보다 해나와 대화를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어제와 똑같이 데면데면하게 인사나 한두 마디 주고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원래도 어렴풋이 느끼던 거였지만, 해나는 꽤 도도해 보이는 외모에 비해 나름대로 둥글둥글한 성격인 듯했다. 때문에 대화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조금 친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물론 아직 쉬는 시간에 서로 마음 놓고 시시덕거릴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조금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기도 했고 그것만도 꽤나 장족의 발전이긴 했지만 대화가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는 것은 한계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두어 시간쯤 지나자 다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 각자 할 일 하는 위치로 돌아갔다.
이런 것도 꽤 지루하군. 은근히 아까운 시간인데 영어 단어라도 외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해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보통 해나는 볼 때마다 스마트폰을 쥐고 뭔가를 열심히 톡톡톡 입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손에 들린 건 전화기가 아니었다. 처음엔 무슨 책을 읽고 있나 했는데, 그 물건의 정체는 검은 커버를 가진 다이어리였다. 반대쪽 손에는 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뭔가를 슥삭거리며 써넣던 해나의 펜이 잠시 멈췄다. 펜 끝이 허공에서 불규칙한 동그라미를 몇 번 그리더니, 입가로 올라갔다. 시옷 자가 된 입술 근처에서 잠시 머물던 펜이 다시 다이어리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뭔가 쓰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는 입술은 이제 반대로 휘어져 슬며시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뭘 쓰고 있는 걸까.
왠지 귀엽다. 그런 불경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올 즈음이었다. 어느새 내 시선을 느낀 해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찌릿, 뭘 보냐는 듯 불만스러운 눈빛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지금만큼은 까칠한 외모 그대로의 느낌이 잘 전해졌다. 나는 불에 데인 듯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그래도 궁금하다. 뭘 쓰고 있을까.
"……."
시간은 빨리 흘렀다. 아까 병원에 다녀온 것도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마지막 수업에 쓰인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매니저 형이 다가와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오늘은 누나가 없어서 힘들었을 텐데 잘해줬다고. 마침 그런 말이 나온 참에 계속 두 명이서 일하게 되는 거냐고 묻자 이런 말이 나왔다.
"둘이면 좀 적은 감이 있기는 한데. 두 분이 방학 때만 일하고 가시는 것도 있어서 바로 사람을 뽑기가 좀 애매하긴 하네요. 수진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아무튼 두 분이 일을 잘해 주시는 것 같아서 아마 한동안은 이 인원으로 갈 것 같아요."
그말인즉 앞으로 한 달 남짓은 해나랑 둘이서만 일을 하게 된다는 거였다. 기분이 좀 묘해졌다. 일은 좀 더 힘들어질 텐데, 이상하게 별로 싫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해나의 반응이 궁금해 눈동자를 살짝 돌려봤지만 그 애는 속내 모를 무표정이었다.
해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함께 나왔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문화센터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렇게 동행하는 건지 아닌지 모를 애매한 상태로 밖으로 나왔다.
집까지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걷기로 했다. 원래 나는 걷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해안 도로를 따라 주택가까지 이어지는 길을 타려고 움직이는데, 해나도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미묘한 동행이 건물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우린 나란히 걷지는 않았다. 내가 앞서 걸었고 해나가 뒤따랐다.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열 걸음 정도. 그렇게 하자고 정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있었다. 분명 혼자 걷는 게 아니라는 자각은 들면서도 제대로 함께 걷자니 보이지 않는 단단한 공기 같은 게 깨져 버릴 것 같은 긴장감. 저쪽도 같은 심정일까.
좁은 인도 옆에는 가드레일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도로에는 이따금씩 자동차들이 지나갔다. 하늘 저 너머에는 빨갛게 잘 달궈진 태양이 노릇거리는 노을을 굽고 있었다. 양떼구름 아래로 적적한 바다에 노란 빛이 번져간다. 파도 소리, 소금기 섞인 바람, 거리는 여전히 열 걸음.
그쯤 되니 왠지 모르게 머쓱해졌다. 하필이면 왜 내가 앞서 걷고 있는 걸까. 여기서 뒤를 돌아서 말을 걸면 누가 봐도 뭔가 어색한 그림이 되잖아. 차라리 내가 뒤에 걷고 있었다면…… 그래도 어색하긴 하겠네.
우뚝. 저도 모르게 발이 멈췄다. 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 애도 열 걸음 거리에서 발을 멈춘 게 보였다. 서로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얼굴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묻어 나오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애매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짓했다. 이리 오라고.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잠깐 불안하게 서성이던 해나의 발걸음이 이쪽을 향하는 게 보였다.
마침내 나란히 늘어서게 된 네 개의 발이 같은 방향으로 바닥을 찼다. 침묵이 이어졌다.
근데 더 얼어버린 이 분위기는 어쩔 거야. 그래,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보자. 뭐라도 얘기를 해야지. 그런데 얘랑 할 말이 뭐가 있지? 뭐가 됐든 일단 입부터 열고 봤다.
"너는……."
"있잖아……."
불행히도 서로 말하는 타이밍이 겹쳐버렸다.
"먼저 말하……."
"너 먼저……."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게 되었다. 머릿속으로 헤아리길 대략 4초쯤, 숨 막히는 눈치 게임 끝에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너 먼저 말해."
"응."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취득하고 나서도 해나는 한참 침묵했다. 이번엔 대략 10초쯤 된 것 같다. 나한테는 몇 분이나 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그 애의 질문은 이랬다.
"학교는 어디야?"
얘기를 좀 더 진행해보니 우리 둘은 놀랍게도 같은 학교였다. 아니, 그렇게 놀랍지는 않은가. 이 근처에 고등학교라고 해봐야 몇 군데 되지도 않으니.
"진짜 우리 같은 학교야? 근데 왜 본 적이 없지?"
그야 노는 그룹이 달랐을 테니까. 나도 친구들은 필요한 만큼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에서 그리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발이 넓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반면 해나는 지금까지 관찰해온 내 시선이 맞다면 나보다 더 잘나가는 그룹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난 그래도 처음 봤을 때 조금 낯익다고 생각은 했는데."
내가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온 해나의 대답.
"작년에 동네 사거리 앞 만두집에서 일했는데. 그때 본 거 아냐?"
해나는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거기가 어딘지 잘 알아들었다. 사거리 앞 만두집이라고 말하면 이 동네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다 잘 알 것이다. 나도 자주 들러 사 먹은 가게이기도 했다. 듣고 보니 정말 거기서 본 것 같기도.
"알바 같은 거 많이 해봤나 보네. 난 이번이 처음인데."
"많이 해봤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째 꽤 우쭐해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멋쩍게 뺨을 긁으며 말했다.
"너는 알바 왜 하는 거야?"
"응? 돈 벌려고 하지."
"그렇긴 한데, 꽤 꾸준히 해온 것 같길래. 돈을 따로 모으는 이유가 있는 건가 싶어서."
"아니. 난 그냥 사고 싶은 게 많아서. 옷 사려고……."
“아.”
잠깐 침묵. 해나가 질문했다.
"그럼 넌 왜 하는데?"
"나는…… 그냥."
"그냥?"
"경험 삼아?"
그러자 갑자기 해나가 웃음을 마구 터뜨렸다. 지난 며칠간 봐 왔던 것 중 가장 크게 웃었다.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 말이 어디가 웃기다는 거지?
"그런 게 어디 있어. 넌 사고 싶은 것도 없어? 난 부모님이 돈 쓸 거면 알아서 벌어 쓰라고 해서 틈날 때마다 알바하는 건데."
"글쎄, 원래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이라."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자 따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배경음악에 파도 소리를 깐 채로 계속 걸었다. 어느새 해는 수평선에 빼꼼히 고개를 걸치고 있었다. 저편에서 키 작은 주택들과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가자 두 갈래 갈림길이 나왔다. 거기서 가는 방향이 갈렸다. 그 애는 내일 보자고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며 나풀대는 걸음걸이가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