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젖어버렸다. 예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건 2주 정도 지난 일이었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전, 아직은 좀 더 봐준다는 듯 며칠 간 쾌적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친척 누나를 만나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장소는 집 근처 분식집.
"그래, 수진아. 서울 가서 살아보니 좀 어떠니? 얼굴 보니 대학 생활이 꽤 재밌나 보네? 예뻐진 것 봐."
"에이 이모도 참. 뭐, 남들도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고요."
나는 옆에서 오가는 낯 뜨거운 대화는 적당히 넘기며 이왕 온 것 배나 열심히 채우는 중이었다. 떡볶이에 들어간 재료 중에선 떡이 제일 맛없다는 내 지론에 따라 열심히 오징어 튀김을 건져 먹었다. 그러고 있으니 금방 맛있는 것만 골라 먹지 말라는 사촌누나의 면박이 날아온다. 무시했지만.
사촌누나 박수진. 어릴 때부터 집도 가까운데다 어른들끼리도 교류를 많이 해온 편이라 넉넉잡아도 1, 2주에 한 번은 얼굴을 보던 사이였다. 그 덕에 사촌누나라지만 거의 친누나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즉,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뜻이다.
다만 재작년 누나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고 나서는 약간은 낯설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 보는 것이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로 줄었다. 친척 사이에 그렇게 가끔 보는 것도 아니냐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길 두 개만 건너면 창문 안까지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가깝게 산 것이 내 평생이다. 오랜만에 만나니 없던 쌍꺼풀이 생겨 있는 누나 얼굴이란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수진이가 벌써 대학교 2학년이야? 여행 같은 건 갈 생각 없니?"
"안 그래도 이번 방학에 알바해서 돈 좀 모으려고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했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평생 내 손으로 10원짜리 하나 벌어 본 적 없는 내게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건 꽤 멋지게 들렸다. 마침 얼마 전에 해외 여행 방송을 보고 언젠가 직접 돈을 벌어 저런 곳에 가 보고 싶다는 꿈을 막연히 가지게 된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와 누나를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누나, 어디서 일하려고?"
"응? 시내에 있는 문화센터에서. 왜?"
"혹시…… 나도 같이 할 수 있어?"
안 되면 말자는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막상 누나는 가만 있는데 엄마가 먼저 반대하고 나섰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입시 공부할 시기인데 그런 걸 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애초에 17살짜리 고등학생을 써 줄 곳이 어디 있겠냐고. 예상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별달리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포기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누나가 두둔하고 나섰다.
"제가 승연이 뽑아 달라고 얘기 한 번 해볼까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전 성인 되기 전에 알바 한 번쯤 경험 삼아 해봐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우리 누나 대천사…….
"글쎄, 그러려나? 그렇긴 해도……."
누나의 말에 엄마는 아주 수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덮어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더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그 날 대화는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고는 솔직히 난 그날의 일을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헤어질 때 누나는 자기가 추천해주겠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나는 누나를 잘 안다. 허세가 좀 있는 편이라는 걸. 딱히 흉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본인도 방학 동안만 일할 아르바이트생인데 자유롭게 누굴 추천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지낸 지 열흘 정도였나. 그래서 누나한테 면접 잡혔다는 연락이 왔을 땐 그게 무슨 소리냔 반응 밖에 안 나왔다. 누나가 정말로 면접 자리를 마련했다는 걸 들었을 땐 꽤 놀랐다. 나중에 사정을 좀 더 듣고 보니 누나는 이전에도 그 문화 센터에서 일을 한 적이 몇 번 있어서 매니저와 나름대로 친분이 있다고 했다. 역시 대천사의 권능이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자초지종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누나의 연락을 받은 뒤에 아빠한테도 넌지시 얘기했더니 한 번 해보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렇게 순조롭게 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이틀만에 일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첫 출근일.
남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건 처음이라 아무래도 좀 긴장된다. 그래도 평소처럼 행동하면 별일이야 있겠어. 마음을 대강 가라앉히고 시내로 향했다. 복장도 따로 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 입던 편한 옷으로 갖춰 입었다.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약간 들뜬 탓일까. 계획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일찍 온 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일단 두리번거리면서 센터 층 내부를 살펴보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시에서 문화 센터 강의에 나름대로 성의 있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설비나 강의의 질 같은 면이 꽤 좋아졌다나. 오늘부터 일할 곳이 2호 강의실. 아직 제대로 수업이 시작하기 전이라 그런지 다소 황량한 분위기를 느끼며 문 위에 적힌 커다란 ‘2’를 찾았다. 큰 유리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근처 벽면에 붙은 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빤히 바라보다 나지막이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며칠 전 내 바로 뒤에 면접을 봤던 여자애였다. 저 애도 붙었구나. 그럼 이제부터 같이 일하는 건가?
이름이 이해나……라고 했던가.
어쩐지 그 애를 의식하기 시작한 나를 발견했다. 나와 달리 그 애는 주변에는 일체 관심이 없는 듯 내내 손에 든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거라도 보고 있는지 이따금씩 입가에 피식 거리는 웃음이 번진다. 하지만 그마저 잠깐뿐이고, 금방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게 되길 반복했다.
끝이 날카롭게 떨어지는 고양이상 얼굴. 화사했지만 그만큼 도도해 보이기도 해서 어쩐지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같이 일하게 되는 만큼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의외로 일단 겪어보면 붙임성 있는 성격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때였다. 저쪽에서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가렸던 전화기를 살짝 치우며 내 쪽으로 머리를 갸웃했다. 순간 뜨끔한 나는 얼른 시선을 떨구고 괜히 주머니를 뒤지는 척했다.
때마침 구원투수가 적절하게 나타났다. 눈 감고 들어도 익숙한 발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촌누나 박수진이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 우리 승연이 일찍 왔네. 왜 안 들어가고 이러고 있어?"
들어가다니? 나는 어리둥절하게 반문했다.
"문 닫혀 있는데?"
"뭐야? 그것 때문에 밖에 앉아 있었다고?"
누나가 어이없다는 듯 쯧쯧 혀를 찬다. 그래도 난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너 이제 여기서 일하는 거야. 이때까지 안에 아무도 없으면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겠냐?"
"뭐?"
누나는 더 설명 안 하고 잠긴 유리문으로 다가가 몇 번 흔들었다. 그리고 문 틈새로 얼굴을 대고 뭐라고 몇 마디 외쳤다. 그러자 안에서 ‘네’ 하는 남자 목소리와 부스럭대는 기척이 들린다. 강의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구나.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하세요. 다들 시간 맞춰 오셨네요. 수진씨는 제가 알고, 이쪽이 승연씨……."
"네. 맞습니다!"
"그리고 해나씨 맞죠?"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해나도 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약간 멋쩍어 하는 표정으로 보아 쟤도 나처럼 그냥 문이 닫힌 것만 보고 대책 없이 기다리고 있던 게 분명했다. 이윽고 ‘안녕하세요’ 하고 살짝 고개를 숙인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자, 그럼 이제부터 이렇게 셋이 2호실 담당입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크게 힘든 일은 없을 거예요."
매니저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다. 전에 면접 보러 왔을 땐 텅텅 비어 있던 내부가 오늘은 나름 이런저런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매니저가 우리 세 명을 죽 훑더니 소리를 높여 말했다.
"오늘 오전 첫 수업은 미술이예요. 1층 창고로 내려가시면 이젤이랑 물감 같은 게 있을 텐데, 가지고 오셔서 여기에 열 맞춰 놓으면 돼요. 여기 물품 목록 가져가시고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하셔도 돼요."
우리는 곧바로 물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쾌활한 사람이었지만 역시 같이 일하게 된 첫날의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를 다 걷어내진 못했다. 그나마 나는 누나랑 같이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가끔 원수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건 사실이긴 한데. 이런 상황에선 또 의지가 되니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데 저편에서 이젤과 씨름하고 있는 해나가 보였다. 겹쳐져 쌓인 두 이젤을 생각 없이 당겼다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위기에 처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쓰러지기 직전인 이젤 하나를 덥석 붙잡았다.
사소하더라도 오자마자 실수하게 되는 건 면해서 다행이라 여겼는지, 해나가 호로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곁눈질로 내 쪽을 보며 '감사합니다' 하고 속삭이고는 이젤을 제자리에 놓으려 걸어갔다. 남겨진 나는 괜히 혼자서 어깨를 으쓱했다.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본격적인 여름 수업 커리큘럼이 시작하는 날이 아니라고 했다. 제대로 모든 프로세스가 가동되는 건 다음주가 될 거라고. 그래서 오늘 하루는 점심 조금 지나서 일이 끝날 예정이니 오리엔테이션 느낌으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누나가 좋은 자리라고 했던 게 흰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확실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나 고된 일은 아니었다. 첫 수업 준비로 한 건 이젤이랑 의자, 그 외 준비물 배치 정도. 그리고 수업을 시작하자 대부분은 뒷자리에서 대기하는 시간이었다. 가끔 수강생의 물감이 떨어지면 보충해주거나 엎지른 물건 정리 정도가 있긴 했다. 그 외에는 누나랑 수다 떨 여유까지 있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시 물건들 제자리로 갖다 놓기. 1층의 창고까지 오르락내리락해야 돼서 힘은 좀 들었지만 단순한 일이었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미술 수업이 끝나고 20분의 쉬는 시간을 지나 다음 수업은 요리. 뭔가 잡다하게 준비할 것이 많아지긴 했지만 결국 할 일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창고에서 비품을 열심히 옮기고 나면 강사와 학생들(주로 주부들)이 강의실로 들어온다. 할 일이 끝난 우리들은 다시 대기한다.
그 동안 해나는 나와 누나하고도 좀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 나는 가끔씩 그쪽을 흘긋대며 곁눈질했다. 물론 딱히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나는 인생 첫 알바 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알음알음 느끼게 된 이해나의 첫 인상은 대강 이랬다.
첫 번째,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았다. 약간 까칠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인가. 처음에는 이쪽을 무시하나 하는 심술도 살짝 들 정도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이런 상황에서 낯선 사람한테 서슴없이 다가갈 만한 붙임성이란 게 그리 흔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나랑 누나가 계속 붙어 있으니 끼어 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좀 자존심이 있어 보였다. 일단 주는 일은 열심히 하는 걸 보아 제법 성실한 성격인 건 맞는 듯했다. 당연히 뺀질이보다 성실한 사람이랑 일하는 게 좋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좀 묘한 방향으로 발전했는지 약간 쓸데없는 부분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낑낑대며 무거운 걸 옮기려 하길래 내가 나눠 들자고 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자기가 들겠다고 하다가 끝내 좀 분하다는 표정으로 나한테 넘기더란 말이다.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고민까지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가 많아 보였다. 제대로 대화도 안 나눠봤으면서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 아르바이트는 수업과 수업 사이에 할 일을 끝마치고 나면 대기. 그리고 또 쉬는 시간에 일하고 대기인 단순한 업무였다.
나야 누나가 있으니 잡담이나 하면서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지만 혼자 동떨어진 해나는 딱히 대화할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해나가 딱히 지루해 보이지는 않았다. 인류에겐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불꽃이 함께하기에.
대기 시간 내내 해나는 친구들과 메시지로 수다를 떠는지 엄지 손가락을 쉬지 않았고, 10분 20분은 우습게 통화를 계속하기도 했다. 그러니 친구가 많아 보인다는 추론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상이 내가 퇴근 시간까지 이해나라는 사람에 대해 느낀 인상이다. 아직 대화다운 대화도 못 해보긴 했지만 적어도 첫 인상은 그렇다는 말이다.
"첫날 너무 수고하셨어요. 다들 일을 잘해주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내일도 같은 시간에 보도록 합시다. 안녕히 가세요!"
매니저 형이 인사하자 우리 아르바이트생 셋도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는 길. 센터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해나는 우리 쪽으로 다시 푹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이더니 종종거리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잠깐 멍하게 그 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른 쪽으로 걸어간 누나가 손을 흔든다.
"야, 뭐해? 우린 이쪽으로 가야지."
순순히 그리로 방향을 돌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 도시에 살아온 사람으로서 몇 주 전보다 시내에 사람이 많이 늘어난 걸 바로 눈치챘다. 슬슬 관광 성수기라는 의미였다.
"윤승연. 이제 뭐 할 거야?"
"집 가서 자려고."
"얘는 옛날부터 왜 이렇게 매가리가 없을까."
"잠보다 좋은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원래 늦게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출근 시각 맞춘다고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다. 앞으로 방학 동안은 이 생활 루틴에 익숙해지긴 해야겠지.
"밥이나 먹고 가. 이 누나가 사 줄 테니까."
"누난 천사야."
둘이서 같이 몇 분 걸었다. 누나는 오픈한지 얼마 안 된 피자 가게로 나를 끌고 갔다. 새로 생긴 가게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 내부가 좀 어수선했다. 나는 유행이나 빠르게 떠올랐다 가라앉는 입소문에 그리 민감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데가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자리에 앉고 보니 ‘이런 식당이 다 생겼구나, 맛있겠네, 따라오길 잘했다’ 순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 김 나는 피자 한 판이 놓였다. 신나게 먹고 있으려니 우리 누나는 한껏 폼을 재며 말한다.
"오늘 일은 어땠어?"
"생각보다 괜찮던데. 짐 나르는 건 좀 힘들긴 한데 그거 말곤 크게 하는 일도 없고. 너무 편한 거 아냐?"
"얘가 배가 불렀네. 물류 센터 같은 데서 좀 일해봐야 이런 자리 귀한 줄 알지."
"누난 거기서 일해봤어?"
"아니."
하긴 해봤을 리가 없겠지. 속으로 투덜대며 이젠 조금 전보다 얌전하게 먹기 시작했다. 배고픈 게 좀 가셨기 때문이다. 누나가 다시 말했다.
"그럼 해나는 어땠어?"
순간 내 어깨가 들썩했다.
"걔는 또 왜?"
그러자 누나는 곧바로 짓궂은 미소를 떠올렸다. 내게는 익숙한 표정이었다. 볼 때마다 미취학아동 시절로 돌아가 한 판 드잡이를 해보고 싶은 심정으로 만드는 미소였다.
"너 걔한테 관심있어 보이던데? 아니야?"
나는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오늘 해나라는 애한테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건 맞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티 났나.
"그냥 본 거야. 한 달은 같이 일해야 되잖아. 어떤 애인지는 알아야지."
"그래? 그래서 어떤 애인 것 같은데?"
"글쎄…… 생긴 건 까칠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말이 많지는 않아도 보기보단 둥글둥글한 느낌? 의외로 낯도 좀 가리는 것 같고. 성실하긴 한데 승부욕 좀 있어 보이고. 잘은 모르겠지만 친구도 많은가 본데?"
말을 하는 동안 누나는 왠지 모르게 계속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짜증 나서 그냥 고개 숙이고 먹기만 했다.
"연애 한 번 해봐. 알바하러 와서 이것저것 다 얻어 가면 좋지."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더 이상 말해봤자 듣지도 않겠지. 이후로도 누나는 자꾸 지분거리려 했지만 나는 적당히 대꾸해주며 먹는 데만 집중했다. 아니, 애초에 안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겠냐는 말이야. 첫눈에 반하고 그런 건 영화에나 나오는 거잖아. 애초에 걘 오늘 종일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던데. 백 번 양보해 내가 감정이 있더라도 그쪽에서 나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친구는 될 수 있을 지도.
점심을 다 먹은 후, 누나는 약속이 있다며 나만 두고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식사하는 내내 실컷 휘둘리긴 했지만, 그래도 맛있는 거 사줬으니 넘어가자는 마음으로 보내주고 혼자서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바다 쪽으로 걷고 싶어져 방향을 바꿨다. 해수욕장도 없이 바위뿐인 해안가. 좀 더 걷다 보니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어졌다. 어디 잠깐 들를 곳이 없나 생각했다.
학교는 방학이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첫날이라고 일찍 끝나서 그리 늦은 시각도 아니었다. 당장 연락해서 불러내도 나올 만한 친구도 한두 명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대신 계속 걸었다. 종일토록 시원한 에어컨 바람 맞고 다녀서 잘 몰랐는데 오늘도 몹시 덥구나.
얼마나 걸었을까. 중간부터 속으로 정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 비밀장소. 작디작은 백사장. 도화지 한 폭에 움푹 담길 정도로.
원래 여기에 이렇게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나, 정리할 생각이 있을 때만 오는 정도였다. 지금껏 내 삶은 단순했고 그렇게 많은 고민이 필요한 순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모래 위를 걸어 파도에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 밀려갔던 파도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운동화와 양말을 흠뻑 적셨다. 그것도 모자라 바짓단까지 올라왔다. 이런.
푹 젖어버렸다.
예상조차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