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1화

내 마음 속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어

by 하이드

내 마음 속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어


말로 뱉으면


전해지지 않고 흩어질까


구름 한 자락 뜯어내


잘 덮어 두었네





실은 네게 들키고 싶어


일부러 봉긋이 쌓아 두었어


손 닿는 순간


파도처럼





흐드러진다


하늘빛 계절


우리의 여름








성긴 파도 끝에서 손만 뻗으면 그대로 붙잡힐 만큼 태양 볕이 가까웠던 여름날. 썰렁한 백사장에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붓에서 먹물이 떨어져 남은 듯.


천천히 이어져 바다 앞까지 나아갔다. 신발에 모래가 스며들어 까끌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얕은 파도가 밀려왔을 때는 얼른 몇 걸음 물러났다. 다시 밀려갔을 때는 다가갔다가, 또 다시 돌아오자 다시 뒷걸음질쳤다.


저 먼 바다에서 파도 끝이 하얀 포말로 부서져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끝없이 부서지며 다시 쌓아 올리기를 반복하는 파도들. 대체 어디까지 떠났다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저 바닷물은 지구 반대편 모래도 만져 봤을까.


시선을 올려 앞을 보았다. 새파란 바다와 하늘은 수평선 즈음에서 맞닿아 경계조차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날이 밝아 보이지 않지만 달이 저 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언제나 파도는 달에 이끌려 오간다고 하니까. 달은 지금은 보이지도 않는 데다,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렇다면 파도는 언제나 달만 바라보고 흔들리는 걸까. 단 5분간의 휴식도 없이. 바다가 마를 때까지 결코 닿을 수 없는 달에게 손을 뻗고 있는 걸까.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다가오고. 쉬지도 않고 반복하면서. 그것은 무척 지치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엔 파도들이 머무는 보금자리가 있을지도 몰라.





파도의 집.

















이런 생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하지만 누구한테 말하든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할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들에게 말해본다고 하면, 분명 그날 최고의 놀림감이 되겠지. 시인 납셨다면서. 고등학교 1학년 남자들이란 어떻게 해야 친구를 기발하게 놀려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걸로 하루를 다 써버리는 생물이니까.


그러니까 이 장소는 나만 알고 있는 편이 낫다. 그렇게 되뇌며 손바닥만 한 백사장 위를 느긋하게 거닐었다.


손바닥만 하다는 건 그리 큰 과장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열 걸음 정도면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를 수 있는 해변. 주위는 거친 해식 절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기어 들어온 개구멍 하나를 빼면 여기까지 들어올 길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그 개구멍을 아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을 거다. 만일 있다고 해도 굳이 들어올 용건은 없을 테니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아늑하고 좋은 곳이긴 했지만 이 해변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프라이빗 비치로 쓴다고 올 만한 곳도 아니었고, 경치 한 번 보겠다고 귀찮게 기어 들어올 정도로 절경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여긴 내 공간이다. 내 해변. 내 쉼터. 어릴 적 이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여기에 들러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고는 했다.


오랫동안 의자로 써온 바위 하나에 턱 걸터앉았다. 가방을 열고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파도 소리가 음악처럼 귓바퀴 속으로 파고들었다.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솨아아아…….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다. 파도 소리를 송곳처럼 가르는 뜬금없는 전자음에 몸을 들썩이며 눈꺼풀을 올렸다. 나도 모르게 까무룩 선잠이 들었나 보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전화기를 꺼냈다.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사촌누나에게서.


'야 너 오늘 알바 면접이다. 안 까먹었지?'


까먹고 있었다.


그나마 준비성이 훌륭하신 우리 사촌누나 덕에 지각은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얼른 읽던 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들어왔던 개구멍으로 다시 돌아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탁 트인 도로가 나왔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가드레일을 따라 걸었다. 길 아래로 파란 바다가 끝간 데 없이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내 비밀장소는 절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 근처엔 버스 정류장이 없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조금 걸어야 했다. 얼마간 걷자 와글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조금씩 귓바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걸음마다 점점 커져갔다.


내 오른쪽 아래로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슬슬 성수기에 들어서는 한여름이었다. 내 고향. 일 년 중 절반이 넘도록 조용한 작은 바닷가 도시. 가장 붐비는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몇 번을 해도 새로운 것이 사람 구경이라지만, 나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곁눈질로 사람이 바글대는 해변을 흘깃거릴 뿐이었다. 대신 옷깃을 흔들어 더위를 달랬다. 어차피 여름 내내 피서객들이야 얼마든지 보게 될 터였다.


아직 본격적인 한여름이 아님에도 아스팔트가 지글거리는 무더위였다. 그나마 바닷바람을 실컷 맞을 수 있는 것이 바다 근처에 사는 것의 장점이라고 할까. 본래는 버스를 탈 요량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거였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저 수많은 해수욕 관광객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간 내릴 때쯤엔 소금괴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발걸음을 서두르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좀 더 걷기로 하고 시내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사촌누나를 통해 구한 아르바이트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시내에 위치한 시민문화센터.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익숙한 쇼핑센터 건너편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한때는 그 쇼핑센터 내부에서 운영하던 거였다는데, 그러다 오래전에 따로 독립해 나왔다는 것 말고는 잘 몰랐다. 다시 말해 지나다니며 익숙하게 봐온 건물이긴 해도 큰 관심을 둔 적이 없던 곳이었다.


'야 답장 안 하냐'


'왜 안 오냐고'


'야 야 야 야'


전화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보낸 사람은 역시나 사촌누나였다. 답장하기 귀찮아 그냥 무음으로 바꿔 버렸다. 아직 면접까지 30분은 남았는데 뭐가 그리 급한 건지. 어차피 1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익숙하지만 낯선 문화센터 건물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출입문을 통과했다. 3층짜리 건물이었고, 1층은 사무실 등 시설이 있는 곳. 내가 갈 곳은 강의실이 있는 2층이었다.


"어 왔네? 야 윤승연! 뭐 하다 이제 와!"


다짜고짜 내 이름과 욕설처럼 뱉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던지니 과연 우리 사촌 누나다. 마뜩잖은 태도로 그쪽으로 다가가자 또 시원하게 윽박을 지르기 시작한다.


"늦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느적느적 오냐? 이거 하겠다는 사람 줄 섰어! 소개해준 누나 괜히 욕 먹이려고 그래?"


그 말 대로 알바 하고 싶다는 동생 꽂아준 건 고마운데, 말 좀 곱게 해주면 안 되나.


"20분은 일찍 왔는데 뭘 그래?"


"그럼 답장을 미리 하든가. 손가락 부러졌어? 하여간에 저 버릇을 여태 못 고쳤네."


"알았어. 미안해……."


일단 사과하고 누나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확실히 늦지는 않았다. 도착하고 나서도 20분은커녕 30분 가까이 되어서야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던 것이다.


수강생이 아무도 없는 강의실은 유독 썰렁해 보였다. 이런 곳에 마지막으로 와본 적이 언제였을까. 10년 전인가 키즈 미술 수업 듣는다고 집 근처 허름한 백화점에 나가본 기억이 있는 듯도 하다.


강의실 구석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니 멀끔한 인상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인사한다. 누나 말에 따르면 여기 매니저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문은 닫아 주세요. 윤승연씨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고등학생이시라고요."


"네."


"부모님 동의서는 가져오셨나요?"


"잠시만요."


그건 계속 책가방에 넣어 다니고 있어 다행이었다. 서류를 건네받은 매니저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확인하더니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방학에만 일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면접은 그런 식이었다. '네, 네'하면서. 힘쓰는 일 잘한다고 들었다는 질문에는 잠깐 ‘네…… 네?’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대부분 무난하게 넘겼다.


애당초 누나가 추천해준 아르바이트였다. 누나 말을 믿는다면 면접은 얼굴 정도만 확인하는 자리였으니 어지간하면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름의 열의는 보이긴 했지만 생애 첫 아르바이트 면접이라 슬그머니 걱정이 들긴 한다. 그래도 어련히 잘 되겠지. 괜한 잡념은 접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네. 잘 들어가세요, 승연씨."


그리고 뒤돌아 나올 때였다. 강의실 출입문이 몇 걸음 떨어진 시점, 누군가가 문을 밀고 텅 빈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을 보니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 애와의 거리는 금세 가까워졌고 서로 엇갈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작 몇 초, 스치듯이 옆을 지나쳤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알싸하게 코끝을 적시는 라벤더 향은 기억에 남았다.


저 뒤에서 매니저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면접 오신 거죠?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에 대답하는 목소리도.


"이해나예요. ‘햇님’할 때 ‘해’요."


그때까지도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눈치채는 데 한참이 걸렸다. 처음으로 내 마음이 파도를 낚아챈 청새치처럼 태양을 향해 자맥질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