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의 직장생활 | 깊은 좌절감..일상의 욕구들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소수민의 직장생활 | 깊은 좌절감..일상의 욕구들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반복되는 승진탈락...
그 박탈감과 소외감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기에 내 안의 외로움은 더 큰 것 같다. 좌절감과 무력감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계속 눈물이 났다. 차를 중간에 세워 운전대에 얼굴을 박고 소리 내어 실컷 울었다.
퇴근 후 집에 왔는데 갑자기 며칠 전 담갔던 백김치 맛이 궁금해졌다.
백김치와 삼겹살을 먹는데 너무 맛있었다. 백김치는 딱 잘 익었다. 삼겹살과 먹으니 꿀맛이었다.
그런데... 이 처절한 슬픔 속에 먹는 삼겹살이, 이.렇.게.. 꿀맛이어도 되는 건가!?
맛있는 것을 먹고 있지만, 가슴 한편에 눌러져 있는 설움은 그대로였다. 입 안 가득 볼이 터질세라 삼겹살과 백김치를 우적우적 씹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무거운 멍울 같은 것이 느껴졌고,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문득 '눈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위로 오른다.'는 속담이 이럴 때 사용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다음날 저녁에는 송년 모임에 초대받아서 갔다. 어쩌다 앞자리에 앉았는데 소프라노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그 풍경이 슬픔에 빠져 있는 나만을 위한 공연처럼 느껴져서 큰 위로가 되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속 울음을 삼키고 있었지만, 나는 오늘 밤의 이 아름다운 선율도 흠뻑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눈물이 나는 것도 내게 필요해서 난다는 것을... 큰 좌절감을 매년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날 수 있고, 어떻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감정을 겪을 때마다 없애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내가 차츰 치유되고 있다는 것이 알아졌다.
평소에는 휴가 한번 내는 것이 눈치가 보여 쉽게 못 냈었다. 반복되는 승진 탈락으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침울해 보였다. 울상으로 있을 바엔 차라리 며칠 출근하지 말고 좀 쉬어도 된다는 무언의 배려를 동료들에게 받을 수 있어 휴가를 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 다음날 아침은 남편이 아바타 영화를 조조예매 해서 보러 갔다. 조용히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남편도 나를 위로해주려고 휴가를 냈기 때문에 그냥 이끄는 대로 영화관으로 따라갔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선을 깊이 있게 다뤄서 몰입도가 높았다. 아바타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제임스카메룬 감독은 동양사상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멋있는 분이다.
인간의 몸은 죽고 아바타의 몸으로 살아가는 쿼리치 대령에게 제이크설리가 한 대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너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너는 자유롭다. 그걸 모르는 너는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망치고 있다." 그 대사가 너무 감동적이었다.
과거의 경험은 기억 속에 저장되고, 그 기억을 통해 현재를 판단하고 또 다른 생각을 생산한다. 그러기에 현재 이 순간에 작용하는 나와, 과거의 나가 다르다는 것을 모르면 그것이 마음을 가려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영화는 감동스러웠지만,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몰입도가 높아서 3시간이 넘어갔지만 지루함 없이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울컥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눈물은 계속 흘렀다.
영화에 대한 감동스러움도, 승진 좌절에 대한 아픈 멍울도 내 안에서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마음속으로 겪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감동은 감동대로 느끼고 있었고,
눈물은 흐르도록 그냥 놔두며 우울한 마음도 없애려 하지 않고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우울한 마음이 작용할 땐 그 우울감에만 매몰되지 않고 또는 우울한 마음을 거부하지 않고 있었다.
그 우울한 마음을 충분히 느끼며 바라봐 주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감동스러운 마음이 작용할 땐, 그 감동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솔직하게 대하는 것이고,
그것이 나의 아픈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고,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란 걸 알아졌다.
나는 지금, 가장 나답게 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장품 살 것이 생각나서 걸어가다가 올리브영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에 들어온 김에 어떤 상품이 있는지 궁금해서 매장을 둘러보았다. 신상품이 있어 이것저것 소소한 몇 가지를 사가지고 왔다. 새로 산 화장품이 내 피부에 맞을지 안 맞을지 궁금했다. 화장품 쇼핑은 나의 우울한 기분을 잠시 또 잊게 했다.
오후에는 혼자 호수공원을 산책했다. 매일 출근하고 일한다고 낮 시간에는 호수 산책을 할 수 없었는데, 며칠 휴가를 내니 낮에 혼자 조용히 산책하는 시간이 평화롭고 좋았다.
승진탈락으로 깊은 좌절감에 빠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일상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나의 괴로움도 정상이고, 동시에 나의 욕구(본능)가 함께 하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은 처절하게 괴롭지만 백김치와 먹는 삼겹살의 꿀맛을 느끼고, 아름다운 공연과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흠뻑 감동받고, 화장품을 사면서 쇼핑 욕구를 해소하며 우울함을 잠시 잊고... 그 일상의 욕구(본능)들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잠시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나를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그것들이 끌고 가고 있었다.
마음도 유통기한이 있으므로 이 좌절감은 또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나야 옅어질 것이다. 내가 이 직장을 관두지 않는 한은, 끝나지 않는 나의 승진 숙제는 반복적으로 나를 또 힘들게 할 것이다.
삶은 내 뜻대로 좋은 날만 선택해서 살 수 없고, 괴로운 날도 내게 똑같이 주어진 하루하루이다. 결국 괴로움 속에서도 그 주어진 하루들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본능과 욕구를 통해 나와지는 것 같다. 그것들은 나의 일상을 지탱하는 생명력이기에 소중하다.
평생 몸 담은 나의 소중한 직장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한 괴로움은 있지만, 지금 시절 나의 삶을 사랑하고 그 외로움을 오롯이 견디고 있는 나 스스로를 잘 돌보고 싶다. 그 괴롭고 힘든 마음이 내 안에 머물 만큼 머물다가 잘 떠날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는 것이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이고 존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멋찐 작가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