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돼도 된다더니, 스님이 될 뻔했다 4

보따리를 들고 떠난 열아홉 살의 출가(出家)



1. 떠날 채비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향일암에서 흘렀다.


기왓장 불사도 돕고, 기념품 가게도 일주일 내내 지키고, 법당 청소까지 — 나름 절 살림을 제법 거들었다 싶었는데, 그새 엄마 전화가 끊이질 않더니 결국 나를 데리러 직접 오셨다. 막둥이 없는 한 달, 말은 안 해도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올 때는 정말 간단했다. 책가방 하나에 츄리닝, 칫솔, 화장품 샘플 몇 개, 속옷 —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노보살님은 떡이니 과일이니 마른 나물이니 이것저것을 한 아름 싸주셨고, 종무소 스님께서는 따뜻한 인사와 함께 용돈 봉투에 직접 만든 녹차 한 세트까지 챙겨주셨다. 가볍게 들어온 곳이었는데, 엄마 차가 세워진 주차장까지 보따리 보따리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모습이라니.


엄마가 눈을 휘둥그레 뜨시며 말씀하셨다.

"왐마!! 뭘 이리 한 보따리씩 들고 오냐?"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어디 가든 다들 이뻐해 주시니까 이것저것 챙겨주그만~"


구불구불 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순천 가면… 또 무슨 알바를 해야 할까?'


2. 꼬리를 무는 생각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빈둥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4년제 대학 — 졸업 — 취업 — 경쟁 — 결혼 — 아이 — 또 다른 무언가... 그 끝에서 결국 마주한 건 이 한 문장이었다.

'사람의 욕망이라는 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구나.'

순간, 묵직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나는 — 놀랍도록 즉흥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내가 —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래! 이 험한 세상에서 죄지으며 살 바엔, 차라리 스님이 되자!!'


... 뭐, 솔직히 말하면 현실도피였다. 거창하게 상실감이라고 포장해 놨지만 — 그냥 막막한 현실이 무서웠던 열아홉 살이, 도망칠 곳을 찾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ㅋㅋㅋ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때의 나는, 그게 진심이었다.



3. 경상북도 김천 — 청. 암. 사


향일암 기도 스님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수화기를 붙들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스님께서 알려주신 곳은 우리나라 손에 꼽히는 비구니 승가대학, 경상북도 김천 청암사였다.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었다. 네이버도, 구글도 없던 시절, 모든 정보를 두 손으로 직접 찾아야 했다. 나는 경상북도 지역번호를 누르고 114에 전화해 청암사 번호를 물었고, 바로 연결해 길을 여쭤봤다.


전화기 너머로 친절한 스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천에서 대구까지 버스 타고, 대구에서 김천 가는 버스 갈아타고, 김천에서 증산면 버스 또 갈아타서 한 시간 들어오면 되는데 — 기사님한테 미리 청암사 간다고 꼭 말씀드리세요."


고속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열아홉 살의 나는 평생 경상북도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었다.

'하… 엄청난 여정이 되겠구나.'

그래도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나다운 방식으로.


경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제일 친한 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더니, 친구는 가지 말라고 펑펑 울면서 — 그러면서도 자기 지갑을 탈탈 털어 5만 원을 건네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기적이었다. 내가 발 딛는 곳마다 항상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4. 엄마 방 앞에서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특히 엄마한테는.


대신, 긴 편지를 썼다.


지금도 엄마는 가끔 그 편지 이야기를 꺼내신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하신다는 문장은 이거였다.



"엄마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생에선 엄마 딸이 아닌, 스님으로 살면서 모든 가족과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저 문장이 어디서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ㅋㅋㅋㅋ 진짜로.)


드디어 D-Day.


평소엔 아침잠이 많은 내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준비해 둔 가방을 들고, 편지를 식탁 위에 곱게 올려두고, 엄마 방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엄마 얼굴이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열면 엄마가 깰 것 같아서 —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문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코 고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나는 순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다음 편 예고 ↓

(순천은 터미널이 하나니까, 대구도 당연히 하나겠지 —전라도 촌년의 위험한 상식이 대구에서 산산조각 나던 날."아니, 터미널이 왜 두 개여?! 나 지금 어디 있는 거여?!"패닉 그 자체였던 그날의 이야기,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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