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2013년도 벌써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말은 이제 귀에 진부하게 들릴 정도의 관용어구가 되었는데요. 이 시간의 속도가 정말로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하루가 너무 길어 한숨이 나왔던 청춘의 나날을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오십이 지나는 지점, 이 시간의 속도는 정말 달라진다고 합니다. 스무 살 때의 친구가 일 년 뒤에 만나자고 하면 아마 이게 미쳤나? 할 겁니다. 하지만 오십 대의 친구들은 연말에 만나자,는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1년이라는 만남의 텀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나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이제 나의 삶이 유한하다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무 살은 자신의 유한함을 머리로는 의식할 수 있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자신이 주어가 된 세상이 끝난다는 걸 긍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십 정도 되면 이제 내가 사라져버린 세상이 엄연히 잘 돌아갈 수 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없는, 내가 없어진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 없이는 버틸 수 없습니다. 하물며 내가 사라진다고요? 그런데 그건 너무나 자명한 명제잖아요.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는다. 이 삼단 명제만큼 확실한 것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받아들이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요? 어두워집니다. 우울해집니다. 득도하고 해탈하고 그러는 고차원적인 경지는 어렵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일지도 몰라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달려와 쌓아놓은 것들을 이제는 하나씩 잃고 지워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요?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놀랍게도 <비터문>의 원작자입니다. <비터문>은, 무려 93년도에 나온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입니다. 에로틱한 영화입니다. 휴 그랜트 주연입니다. 영화 내용이나 완성도는 사족이 될 것 같으니 궁금하신 분은 직접 찾아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저는 그 원작자인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라는 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오십대를 앞뒀거나 아니면 그 지점을 통과하시는 분들이 꼭 읽으셨으면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니 더 젊은 분들이 읽어도 무방합니다. 어떻게 현명하게 나이듦을, 특히나 오십 이후의 나날들을 맞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정말 통찰력 있는 에세이이니까요. 워낙 유명한 소설가의 저서니 잘 읽히고 후루룩 넘어가니 어렵고 지루할 거라는 우려는 벗어두시고요.
루틴, 시간, 욕망, 사랑, 기회, 한계, 죽음, 영원의 테마를 중심으로 이제 중년의 능선을 통과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하게 이왕이면 즐겁게 하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동서양, 고금의 철학자, 작가들의 조언들과 작가 자신의 경험, 사색을 통한 조언들이 금과옥조 같아요. 물론 딱 떨어지는 명쾌한 해결책이나 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 삶이 그럴 수가 있나요? 그럼에도 흐린, 안개지대 같은 이 시간을 통과하는데 이 책은 정말 고마운 안내 책자가 되어줄 겁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줄친 문장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익히 말했듯이 생은 늘 약속이라는 구조를 띤다. 무엇에 대한 약속인가? 약속의 대상은 특정되지 않았다. 우리의 요람을 들여다본 요정은 없었다. 지켜진 약속, 결코 지워지지 않을 약속은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그 삶이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