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
한때 십대 아이들을 중심으로 부모에게 "내가 바퀴벌레로 바뀌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딘가 귀에 익은 질문이죠. 그렇습니다. 바로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깨어나 당면한 상황이죠. 그런데 왜 이런 가정법이 하필 십대 사춘기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걸까요?
그건 아마도 작품 속 그레고르 잠자와의 상황과도 비슷한 사춘기 아이들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방긋방긋 웃는 예쁜 아기도 아니고 빛나는 상장을 가져와서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던 초등 어린이도 아닌, 질풍노도와도 같은 사춘기의 내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이런 반문을 해보고 싶은 게 아닐까요?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그런 아이들의 엉뚱한 메시지를 장난으로 응수했겠지만 저는 이 질문이 그 어떤 질문보다 이런 진지한 의문과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여 마음이 좀 찡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 은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가지는 기능적 의미에 대하여 대단히 냉소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낭만적이고 이상적으로 가족은 무조건 사랑과 지지로 묶여 있다 속단하지 않습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집안의 가장입니다. 빨대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어머니, 속된 말로 허영이 있는 여동생을 대신해 집안의 가장 역할을 기꺼이 떠맡습니다. 그리고 이 그레고르 잠자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놀랍습니다. 오빠가, 아들이 흉한 벌레로 변하자 모두 슬슬 뒷걸음질 칩니다. 숨기고 심지어 공격합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참아내는 것에 고통 받습니다.
그가 마침내 벌레로 죽자 오히려 그 셋은 뭔가 통쾌함을 가지고 각자 방기했던 역할까지 다시 찾게 됩니다. 돈을 벌고 신랑감을 찾고 똘똘 뭉쳐 여유로운 산책까지 나갑니다. 이거야말로 대단한 반전이죠. 그레고르 잠자가 아니면 도저히 기능하지 못할 것 같던 가족이 그가 없어지자 마침내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되는 결론이요. 그러니까 여즉까지 그들은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던 거죠. 한 명에게 모든 어렵고 번거로운 책무를 밀어넣고 기생하는 삶을 살았던 거예요. 이런 불균형의 모습이 가족 간에 보여지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가 비대한 역할을 떠맡게 될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사랑이자 헌신으로 포장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가족이라 가정이라 다 허용되고 묵인되는 게 마땅할까요?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동생이니까 다 참고 넘겨야 하는 걸까요?
가족도 결국 가장 작은 단위의 혈연으로 혹은 계약으로 맺어진 인간의 사회입니다.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신뢰와 배려, 존중이 나가는 자리에 반드시 부정적인, 바람직하지 못한 그 무엇이 끼어들고 이것은 뇌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가정이 유지될 때 어느 하나가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하면 붕괴되고 맙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관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신뢰죠. 누군가 바퀴벌레로 변해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 안심하고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