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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자의 전성시대 Jul 15. 2024

엑스트라인줄 알았지만 사실 주인공이었다

 예전 기운이 남아돌 때의 나는 시험이 끝나거나 문제를 해결했을 때는 만화책 대여점에서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빌려 밤 10시부터 읽기 시작해 좀비눈을 하고 눈을 들면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이때의 기분은 머라 말할 것 없이 행복했다. 

 이 기억이 좋아 시간이 생기면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몇 달 전부터 '몰아보기'란 말이 무색하게 긴 시간 동안 <철인왕후>라는 드리마를 시청했다. 찔끔찔끔 보면서 지난주에 마지막 회까지 힘들게 다 보게 됐다. 


 참 말도 안 되는 드라마다. 세도정치 기간의 무능한 철종을 재해석해서 백성을 진정 사랑하는 군주로 바꾸고, 현대의 남자가 과거의 철인왕후의 몸으로 들어가는 판타지까지 내가 매우 싫어하는 류의 드라마였다. 하나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신혜선 배우의 열연과 철종이 진짜 이런 군주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의 엑스트라급 등장인물 중에 소경에 귀머거리 할머니가 등장해서 안동김 씨 권력의 상징 대왕대비의 마사지사로, 중요한 정보를 빼돌리는 스파이로 나온다. 어릴 적 안동김 씨 일가가 노비처럼 부려먹기 위해  눈과 귀를 일부러 상하게 했다는 서사가 나온다. 

 드라마나 책을 적당히 본 사람들은 대략 뒤의 내용이 추론된다. 이 할머니가 등장했을 때 왠지 빨리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극의 후반에서 안동김 씨에 의해 가장 먼저 제거당한다. 왜 이분께 나의 감정이 이입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죽을 때 가슴이 아팠다. 


 극 중 이분의 서사가 안타까운 것도 있지만, 배우로서 이분은 엑스트라로 제일 먼저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드라마에는 주인공과 주조연급과 조연급의 출연자등으로 나뉘는데, 조연도 엑스트라는 아니지만 비중이 낮은 조연과 여러 회차에 한 번 나오는 엑스트라급 조연으로 또 나뉜다. 이분은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이건 내가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드라마에서나 이분이 엑스트라이지 이분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다. 드라마 밖에서 이분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고 있을텐데 나는 모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분의 인생에서 이분은 주인공이고 '철인왕후'라는 드라마는 조연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속이 좀 시원해졌다. 이분의 삶을 방증하면 나 또한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엑스트라 같으나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내 인생에서 나는 매회 매번 나온다.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매 회 계속 나오기 위해 엄청난 분량을 소화해 내야 한다. 드라마의 성공여부는 주인공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왜 매일 수많은 일들 속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자신의 삶을 엮어 제법 멋진 드라마를 완성하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으아,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하고 내 삶에서는 엑스트라 하면 안 될까?

스쳐 지나간 이 할머니 배우 덕분에 오늘도 쓸데없지만 의미 있는 생각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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