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픔을 영화가 위로하다

<왕과 사는 남자>

by 영자의 전성시대

벌써 영월 방문이 6번째다. 부모님과 올갱이 해장국을 먹으러 들렀다가 배부른 김에 청령포에나 들러볼까?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으로 돌아왔던 첫 번째 기억.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청령포로 가서 지난번 보지 못했던 곳곳을 눈에 담고 돌아왔던 두 번째 여정. 그렇게 여러 번 영월을 방문했지만 단종이 계신 장릉만은 갈 수 없었다. 사실 청령포도 더 이상 가기 싫을 만큼 아름답지만 슬픔이 배어 있는 곳으로 갈 때마다 서늘함을 마음으로, 온몸으로 느끼고 돌아왔다.


이번에 영월을 가게 된 이유는 영월 소금빵을 먹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소금빵을 먹기 위해 1시간 반을 달려 영월역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단종의 능인 장릉을 지나가게 된다. 지나가다보면 숲이 무성한 장릉을 엿볼 수 있는데 고즈넉한 자리에 위치해 있어 조용하고 나무들로 둘러싸여 그 안이 은근 비밀스러워 보였다. 성수기인 여름에도 방문객이 많지 않았고 늘 한가롭고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의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여러 번 같은 길을 가지만 눈길을 돌리고 싶지 않은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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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장릉 앞의 식당에서 식사도 했고 주변 화장실도 이용했건만 정작 장릉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청령포에서의 마음속에 깃든 그 서늘함이 싫었던 걸까? 역사를 공부하며 계유정난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인가? 12살에 즉위하여 가족에게 고통당하다 16살에 죽은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일까? 도무지 그의 무덤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배지에서의 절절한 기록과 장소들을 보고 가슴속 꼿꼿하게 아로새겨진 아픈 감정들이 내 속에 살아있는 건 분명했고 난 그걸 또 느끼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영월에 다녀온 날 저녁,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아픈 마음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인데, 장항준 감독이라서 역사영화를 너무나 애정하는 탓에 호감을 갖고 있는 유해진 배우라서 등등 이 영화를 보게 만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다만 단종의 이야기라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 했다. 울지 말아야지! 영화에 너무 몰입하지 말고 대충 봐야지! 이건 영화지 진짜 이야기는 아니잖아! 하며 나를 다독이며 들어갔다. 영화는 시작했고 나는 이미 잔뜩 몰입되어 있었다.


엄홍도역의 유해진은 참 연기를 잘했다. 단종역의 박지훈은 처음 보는 배우였다. 나는 처음 보는 배우를 마치 단종인양 얼굴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가 어두우면 아프게, 웃으면 나도 미소 지어가며 영화를 관람했다. 그는 그냥 배우일 뿐인데 나는 그를 단종으로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영화는 생각보다 밝았다. 허구가 잔뜩인 덕분이겠지. 이미 결말을 아는 슬픈 영화를 감독은 덜 어둡게 표현했고 단종은 나약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비관적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유배지의 백성들과의 케미가 재미있고 흐뭇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며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이름도 모르는 백성들이 청령포 앞에서 절을 하며 "전하"를 외치고, 바리바리 싸 온 선물을 강가에 던지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진짜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단종역의 배우얼굴을 살폈다. 이 영화의 단종은 유배당한 지 넉 달만에 죽임을 당했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애끓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세조가 갖지 못한 백성의 사랑을 매일 받는 왕으로 살다 선택한 죽음을 맞이하는 왕이었다. 이 영화가 진짜라면 나는 장릉에 용기 있게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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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오며 잘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만 외롭게만 가슴 아프게만 생각했던 한낱 어린 왕을 이제는 담담하게 역사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무게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결정하는 작은 어른으로서의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가족에게조차 배신당하고 버림 당한 가여운 아이에서 백성에게 사랑받으며 영월의 백성들에게 존경받았던, 자신의 가족을 걸고서라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던 엄홍도의 충심을 받던 전혀 불쌍하지 않던 왕으로 기억하고 싶어졌다.


이 영화에게 고맙다. 혹자는 예술성 운운하며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느니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이 영화가 청령포에서의 끔찍했던 충격을 상쇄하고 위로한다. 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들어갈 때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음에 영월은 어제쯤 가려나, 따뜻한 봄이 오면 찾아 나설까?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단종의 능앞에서 나 또한 "전하"를 외치던 이름도 모르는 백성처럼 '나는 당신을 참 좋아하는 아낙입니다. 그때 나도 살았더라면 몰래 당신을 보러 청령포로 향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신의 삶은 불행한 듯 보였지만 끝내 백성의 사랑은 당신 거였습니다.'


나와 같은 분에게 <왕과 사는 남자>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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