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탄다. 호주에 다녀온 이후 바로 개학이었고 일은 넘쳤으며 독서 동아리들도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내 몸은 시름시름했고 영혼도 시름시름했다. 영혼이 시들해지면서 생각의 울타리가 물렁해졌나 보다. 잡다한 생각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밤새 생각이란 녀석과 씨름하며 잠을 놓쳤고 잠을 잘 자지 못하니 육체는 더 시름이 깊어졌고 입맛도 잃었다.
참 이상한 건 생각이 많아지는 건 나쁜 것이 아닌데도 부정적 생각들이 주로 잔상으로 남아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내가 한낱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 생각이 또 꼬리를 물어 무언가 하려는 의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며 나는 점점 무력해졌다.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손가락 하나 들 힘이 없었다. 아니 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3월 초부터 중순까지 어쩜 그리도 날씨는 안 좋은지, 내 기분과 사뭇 닮아있었다. 미세먼지는 매일 나쁨이라 바로 앞의 산도 보이지 않았고 출근하는 내내 회색빛 풍경을 보며 출근길인지 퇴근길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마음이 회색인데 보이는 것도 회색인지라 참 씁쓸했다. 집에 오면 몸이 힘들고 귀찮아 일찍 잠자리에 들고 뒤척여가며 잠을 계속 자려 애썼다. 찌뿌둥한 생활, 변화가 필요했다.
내 곁의 사람들이 이런 나를 걱정해 준다. 자꾸만 아프니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기도해 주신단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거르고 보건실에서 자니 다른 선생님들이 너무 무리해서 일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한다. 아이들도 매일 아침 자그마한 손으로 와서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몇몇의 아이는 외국에 나갔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특이한 먹을거리들을 선물해 주었다.
고맙다. 너무 고맙다. 그러나 나에게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않았다. 이미 긴 시간 이런 상태였던 것도 같다. 생각해 보니 겨우내 기운이 넘친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한 해가 되었는데도 새롭지 않고, 새로운 일의 제안이 와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걸 보니 평소 나답지 않았었다.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점점 쳐져갔고 긴 시간을 통해 이만큼 나는 내려앉아있었다.
그러다 우리 집 뒤에 정신 못 차리고 핀 자그마한 벚꽃을 보았다. 아직 환절기라 아침저녁이 추운데 이 아이는 어찌나 급한지 벌써 꽃을 틔워버렸다. 다른 얘들은 봉우리도 없는데 이 아이는 혼자 활짝 꽃을 틔워 모두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나는 이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꽃을 피워준 나무가 고마웠다. 회색빛 세상에 작은 점이지만 분홍빛을 보니 신기하고 예뻤다.
며칠이 지나고 학교 앞길에 개나리가 뭉텅이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출근 전 그리도 가기 싫어하던 내 마음이 개나리로 인해 미소가 번졌다. 해마다 봄이 됐다고 나를 맞아주던 개나리가 아닌가! 의리를 지키는 봄꽃을 보니 기분마저 좋아지려 했다. 파릇파릇 산수유도 좋고 쨍한 노란빛으로 세상에 그림을 그려놓는 개나리도 좋고 드문드문 찐한 분홍빛으로 색을 보태는 매화꽃도 좋다.
점심시간 잠시 나와 꽃이 피는 길을 찾아 걷는다. 일에 밀리는 게 싫은 나이가 됐나 보다. 맘이 편해지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는 시기인가 보다. 머리가 비워지고 싶은 바람이 간절한 시간인가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은 노력을 잠시 내려놓은 텀이었나 보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거추장스러움으로 다가왔나 보다. 내 본연의 모습과 편안해진 모습을 회복하고 평안하고 싶었나 보다.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니 지쳤을지도 모르지. 나는 내 마음을 돌아봐준다. 일어나라고 다그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게으르다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개나리는 여름 가을 겨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이나 봄을 위해 기다리며 비축하고 새싹을 돋을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르게 폈던 그 벚꽃도 겨우내 보이지 않는 부지런함으로 준비했던 것은 아닐까?
나도 지금은 부지런히 가만있어보련다. 내 안에 무엇이 충전될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그것 또한 정해보지 않으련다. 무엇이든 빠른 결정과 계획을 갖던 평소의 나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이것도 견뎌보련다. 한번 피고 금세 져버린 뒤, 긴긴 시간을 기다리는 저 자연의 꽃들도 소리 없이 그리 견딘다. 오늘도 자연에게서 느끼고 배운다. 그리고 위로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