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나를 ‘잊힌 책들의 묘지’로 데려갔던 그 새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와 나는 잿빛 하늘 아래로 밀려오던 새벽안개에 굴절된 태양 빛이 구릿빛 꽃봉오리처럼 흩어지던 람블라 데 산따 모니까 (Rmbla de Santa Monica) 길을 걷고 있었다, 1945년 초여름”
이 문장은 바르셀로나 출신 소설가 까를로스 루이스 사폰(Carlos Luiz Zafon, 1964 ~ )이 2001년에 출간한 소설 “바람의 그림자(La Sombra del Viento)에서 써 내려간 첫 번째 문장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바르셀로나를 이야기하면서 인용하곤 하는 부분이다.
가장 바르셀로나 적인 작가가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쓴 소설의 첫 문장에 등장시킨 길이니만큼 람블라스 길은 바르셀로나의 정수에 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람의 그림자 표지
알람브라(Alhambra)로 잘 알려진 스페인 남쪽 도시 그라나다(Granada) 출신 시인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ia Lorca, 1898-1930)는 람블라스 길을 일컬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의 유일한 길”로 표현했다. 얼마나 마음에 닿았으면 그렇게까지 표현했을까.이방인인 나에게도 람블라스 길은 특별하다.
14년째 바르셀로나에 살면서 수없이 이 길을 걸었지만 지금도 이 길에 들어서면 가슴이 뛴다.
그 이유를 나도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책의 처음이 람블라스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억의 처음, 그리고 끝
람블라스 길은 바르셀로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까딸루냐광장(Plaza de Cataluna)에서
항구 쪽 콜롬부스탑 전망대(Mirador de Colom)까지 약 1.3km쯤 되는 길이다.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중앙의 널찍한 보행자 길은 키 큰 가로수들이 만드는 그늘로 언제나 운치가 있다. 보행자 길 양옆으로 1차선의 좁은 차로가 있는데 중앙의 넓은 보행자 길에 비하면 옹색하기 짝이 없다. 길의 주인은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람블라스 길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길이 아니다. 영원히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억이고 아련한 추억이다. 누구나 서랍 깊숙한 곳에 한 권쯤은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일기장이고, 그 일기장에 꼬박꼬박 눌러쓴 빛바랜 글자들이다. 람블라스 길은 막 선물 받은 장난감을 들고 할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던 들뜬 길이었고,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던 따뜻한 길이었다. 커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러 가던 가슴 설레던 길이었고, 그 사랑이 끝난 후 이별의 아픔을 안고 돌아오던 가슴 시린 길이기도 했다.
좋은 일이거나 좋지 않은 일이거나, 그 기억의 처음과 끝은 항상 람블라스로 이어져 있다. 적어도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겐 말이다.
관광객들에게도 람블라스 길은 특별하다.
관광객들이 바르셀로나에 온 후 아마도 가장 먼저 찾는 길이, 그리고 아쉬움으로 마지막에 다시 한번 걷게 되는 길이 람블라스 길이 아닐까. 람블라스 길을 걸으며 바르셀로나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람블라스 길을 걸으며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것을 아쉬워한다.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한 람블라스 길, 마치 바다로 흘러내려 가는 강물을 보는 것 같다.
그곳에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역동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관광객에게까지 전달되어 순식간에 관광객과 바르셀로나를 동기화시킨다. 람블라스 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바르셀로나 관광의 시작점이다.
여섯 개의 람블라
“람블라(Rambla)”의 어원은 아랍어로 “물이 흐르는 도랑”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바르셀로나의 구도심을 관통하는 넓은 길이지만 오랫동안 바르셀로나 뒤쪽 꼴세롤라(Collserola) 산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좁은 도랑이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1285년 Pedro 2세가 당시까지도 도랑이었던 지금의 람블라 길 안쪽으로 새로운 성벽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였고, 아들 Jaume 1세가 완공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벽에 접한 람블라는 물이 흐르는 도랑에서 점차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바뀌어나갔다. 보통 우리는 람블라(Rambla) 대신 람블라스(Ramblas)라는 복수형을 사용하는데 이는 람블라 길이 여섯 개의 람블라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 람블라가 물리적으로 나눠진 것은 아니라 행정적으로만 나누어져 있어 쉽게 구분할 수는 없다.
까딸루냐 광장을 등지고 항구 쪽으로 내려가면서 람블라 데 까날레떼스(Rambla de Canaletes), 람블라 데 에스뚜디스(Rambla dels Estudis), 람블라 데 산 조셉(Rambla de Sant Josep) (또는 람블라 데 플로레스(Rambla de Flores)로 부르기도 한다), 람블라 데 까뿌친스(Rambla dels Caputxins), 람블라 데 산따 모니까(Rambla de Santa Mònica), 그리고 마지막으로 람블라 델 마르(Rambla del Mar)로 이어진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구분은 행정적으로만 의미가 있다. 관광객들은 죽 이어진 길, 즉 하나의 람블라스 길로 받아들일 뿐이다.
명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그라시아 길(Paseig de Gracia)이 바르셀로나 신도시의 중심이라면
람블라스 길은 바르셀로나 구도시의 중심이다. 이 길은 이천 년 전 로마인이 도시를 건설했을 때만 해도 성벽 바깥의 초라한 도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벽 안으로 들어왔고 1854년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성벽이 허물어질 무렵에는 도시를 양분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 되었다. 그라시아 길이 짧은 기간 안에 만들어진 계획된 길인 데 반해 람블라스 길은 이천 년에 이르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투영된 길이다.
현재와 같은 람블라스의 모습이 갖춰진 것은 1700년대 이후다. 람블라스 길의 상징과도 같은 키 큰 나무들은 1701년에야 심어졌다. 1779년에 기름을 사용하는 가로등이 일부 구간에 설치되면서 밤에도 안심하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기름등이 모두 가스등으로 교체된 1842년 이후에는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바르셀로나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하는 중심 길이 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지금의 리세우극장(Teatro Liceu) 부근은 “밤에도 낮처럼 환했다.”라고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