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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진호 Nov 23. 2021

고딕지구 #1

연출된 테마파크

 살아있는 과거


  관광객들은 바르셀로나의 어떤 모습에 설레는가.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 익명으로 섞인 채 강물처럼 흘러 내려가는 람블라스 길. 에메랄드 빛 지중해 위에 그림처럼 떠있는 요트와 그 위의 선남선녀들. 놀이공원에나 있을 법한 앙증맞고 컬러풀한 모더니즘 건축물들. 초록의 잔디 위에서 오락게임처럼 움직이는 FC바르셀로나 축구. 이 모든 것들이 더해져 바르셀로나만의 이미지를 만든다.


  여기에 영화 세트장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고딕지구(Barrio Gotico)도 빼놓을 수 없다. 관광객들은 고딕지구의 좁고 어두운 골목을 걸으며 중세 영화 속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건물의 벽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검은색이고 곳곳에 이끼까지 껴있으니 이보다 더 멋진 세트가 어디 있을까.


  골목 끝에서 휙 불었다 떨어지는 바람, 갑자기 쏟아지는 성당의 종소리, 그 소리에 놀라 후드득 날아가는 새들, 비늘처럼 쌓여가는 노란 가로등 불빛들. 그속으로 잠겨지는 여행자들의 뒷모습.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노스탤지어다. 어쩌면 여행은 미래보다는 과거 회귀되는 여정이 아닐까. 사람들이 유럽의 도시를 찾는 이유는 현대 속에서 살아있는 과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도시도 흥미롭지만 현재라는 문 뒤에 숨어있는 과거의 모습들이 더 재미있다.   

   

고딕지구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있고, 그 옆 언덕길 입구에는 무너진 로마 수로교와 로마 성벽의 기둥이 있다. 로마 식민도시의 중심 광장 포로(Foro)로 가는 낮은 언덕길엔 거리악사의 안쓰러운 기타 선율이 흐르고 그 위로 두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고색창연한 통로를 만난다. 사람들은 일제히 사진기를 꺼내 든다. 그리고는  숨어있던 과거의 흔적을 자신만이 발견한 것처럼 비장하고 엄숙하게 사진을 찍는다. 이제 여행 책자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여행객들은 멀리는 이천 년 전으로, 가까이는 천사백 년 전으로 날아갔다 날아온다.


  언덕을 넘어 왼쪽 골목 끝에 숨어있는 왕의 광장(Plaza de Rei)은 또 어떤가, 천 사백 년대  건물들에 둘러싸인. 오래되었지만 아주 잘 정돈된 중세의 풍경 속에서 바르셀로나와 사랑에 빠진다.


  바르셀로나 고딕지구, 왜 고딕지구라고 부르냐는 질문에 가이드들조차도 이렇게 말하곤 한다. “중세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많은 곳이라서” 그러나 과연 그럴까?      


도시 프로모션


  1902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중남미와의 무역, 그리고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Burguesía)들이 많이 있었다. 까딸루냐 지역주의 정신으로 무장해 있던 그들은 역사적으로 까딸루냐가 가장 번성했던 중세 고딕 시기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까딸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는 영광의 재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산업혁명의 열풍을 타고 밀려든 외지인들로 폭발 직전이었다. 공장에서 뿜어낸 매연은 성벽을 넘어가지 못한 채 도시에 머물렀고 열악한 하수처리 시스템은 시민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좁고 굽은 길을 따라 들어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엔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공간도 갖지 못한 채 밀집해서 살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 불만이 쌓인 노동자들은 폭력적인 데모를 일상화했고 도시를 더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1888년에 개최된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는 역사의 뒤편에  숨어있던 바르셀로나를 국제무대로 등장시켰다. 박람회의 성공에 고무된 신흥 부자들은 일회적인 박람회에 만족하지 않고 상시적으로 관광객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도시를 프로모션 할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대성당 주변의 구도시 지역을 역사가 살아있는 매력적인 장소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는 이천 년이 넘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였지만 크고 작은 전쟁과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야만적인 파괴로 이렇다 하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신흥 부자들은 특별한 감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역사적인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들자”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13세기에 만들어졌지만 아무런 장식도 없이 밋밋하게 서있던 대성당 정면 부분을 1882년에서 1913년 사이에 멋들어진 신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구도시에서 가장 중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비스베(Bisbe) 길 중간에 있는 두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고딕 양식의 통로를 새로 만들었다. 14세기에 지어지긴 했으나 아무런 특색이 없던 대성당 뒤편의 까노니고스집(La Casa de los Canónigos)을 신 딕양식으로 개조했다.(1927) 구도시 지역에서 가장 중세적이라고 평가받는 레이 광장(Plaza del Rey)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들의 장식을 더 고딕적인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비 고딕적인 것들은 모조리 제거했다. 지금 고딕지구라 부르는 곳에는 이런 사례가 셀 수도 없이 많다.      


연출된 테마파크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재의 고딕지구는 실제 존재했던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잘 보존된 것이 아니라 관광객 유치를 위해 없던 것을 영리하게 만들어 넣은, 잘 연출된 고딕지구라는 것이다.  사실이 이럴지라도 어쩌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중세의 분위기를 의심하지 않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테마파크면 어떠랴. 그 속에서 사람이 살고, 그 사람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그런 의미에서 바르셀로나 고딕지구는 성공한 도시 프로모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도 나는 오늘도 고딕지구가 그립다. 세월을 견디며 서있는 검은 돌 담,  그 틈을 비집고 나온 풀 위로 내려앉는 한 조각의 햇살, 구구대는 비둘기 소리, 건물의 실루엣이 그리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 노는 소리, 불어오는 바람, 종소리.


그리고 진한 커피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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