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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PR을 하라는 의미는 업무를 공식화하라는 뜻

by 하나둘셋

"자기 PR을 좀 해 봐." 직장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속 뜻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무래도 '약삭빠르게 굴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것 같아서 요즘은 "업무를 공식화해야 한다."라고 표현을 바꿔서 말하고 있다.


업무를 공식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을 처리하고 나면 '이런 것까지 보고를 해야 하나'라는 갈등을 하다가 결국 주간보고서에 한 줄 끄적이고 끝을 낸다. 과거의 내가 그랬다. 반대의 경우는 일을 처리하기 전에 계획 보고부터 하고 일을 마치면 결과 보고까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잘 만난 상급자 덕이었다. 그는 이전의 상급자들처럼 내게 '자기 PR에 신경 써라.' 같은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내게 "한 장짜리 문서로 만들어라, 결재 시스템에 공람해라, 기관장님이 네 문서를 열람했다는 표시가 뜨기 전까지는 시행하지 말고 있어라, 공람 문서 1,2,3을 묶어서 결과 보고 작성하고 대면 보고 준비해라."라는 식으로 세심하게 지시를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이 흩어지지 않고 쌓이는 느낌이었고 똑같은 일을 하는데 내부적으로 더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느낌이나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도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던 것 같다. 자기 PR을 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가 '자기 PR을 좀 신경 써'라는 예전 상급자들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면, 그런 지적을 받지 않는 다른 동료들의 일하는 방식을 눈여겨봤더라면, 나와 다를 거 없는 일을 하고도 나보다 더 인정받는 동료들을 '사내 정치에 강할 뿐'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일하는 방식은 진작에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오랫동안 헤맨 데에는 나의 고집 탓도 있었을 것 같다.




새로 팀을 맡았다. 언론 홍보 업무를 맡고 있는 직원 한 명은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라는 이유로 모든 업무를 구두 보고로 처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함께 일하게 된 이튿날 그 직원은 기사 한 장을 출력해 와서는 "이런 기사가 났고, 확인해 보니 사실은 이렇고, 기자들 문의에 답변을 빨리 해야 할 것 같다."라고 하더니 국장님께 보고하러 가자고 나를 재촉했다. 내가 "이대로 보고를 하러 간다고요? 아무 문서도 없이요?"라고 물었더니 직원은 늘 지금처럼 했고 문제없었다고 하길래 일단 국장실로 갔다. 직원은 팀장인 나를 제치고 능숙하게 보고를 마쳤는데 국장이 정색을 하고는 "그래서 어쩌라고. 참고하라는 겁니까 결정하라는 겁니까. 그리고, 국장한테 보고를 오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옵니까. 그대로 기관장님한테까지 갈 생각입니까."라고 한다. 나는 아차 싶었는데 직원은 싱글싱글 웃으며 국장에게 "아시잖아요, 언론 쪽은 워낙 급해서요."라며 아무렇지도 않다.


기관장 보고를 하기 전에 내가 급히 문서를 만들었고 직원에게 "다음부터는 이렇게 한 장짜리로 만들어서 보고를 다녀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자 직원은 당치도 않다는 듯 "저더러 매일 밤이라도 새라는 말씀이세요?"라면서 펄쩍 뛴다. (한 장짜리 문서를 만들라는 것이 왜 밤을 새라는 지시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나도 업무를 공식화할 것을 요구하는 팀장들에게 표현 방식이 좀 온건했을 뿐 자기 방식을 고집한다는 면에서는 이 직원과 똑같은 대응을 했던 것 같다.




자기 PR을 하라는 말은 맡은 업무를 공식화하고 그것을 자신뿐 아니라 팀의 성과로 만들라는 의미다. 업무를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법을 익힐 수 있고 내 업무만이 아니라 타 부서의 상황, 보고를 받는 사람의 관심사 등 여러 상황을 종합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된다. '문서작성 능력'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다. 혼자 뚝딱뚝딱해내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연차가 쌓일수록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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