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 시사평론
진실은 분리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통합에 있다.
시끄러운 나날의 연속이다. 정치적 공방이 오고 가는 동안 수많은 것이 흩어지며 지나갔다. 여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부단한 움직임, 야당의 정권 탈환을 위한 공세. 이 모든 것이 정치의 순간으로 자리하며 오늘도 밀도 높은 말들이 방출되고 있다. 고성高聲을 조금만 뜯어보면, ‘역동적이다’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금방 할 수 있다. 귀가 아프고 정신머리가 없더라도 빠르게 산개하는 이 음성들, 우리의 현안과 시간을 보는 것만 같다. 한국 정치가 가진 고난과 피폐함은 잠시 뒤로 밀어 두고, 정치가 가진 이 특성에 주목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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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정치 행위가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자신이 가진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온갖 행위를 통칭 정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라 안이 조용하다면, 그것은 특정 인물 또는 단체가 통일된 신념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을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로, 우리는 이것을 정치가 아닌 ‘통치’로 명명해야 옳을 것이다. 좁게는 정부와 의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입안과 의사 결정 과정, 넓게는 교우 간 점심 메뉴를 정하는 과정까지, 다양한 개인이 공존할 수 있으려면, 정치는 우리 삶에서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끄러워야 한다. 부장님의 짜장면을 공유할 것인가? 아님 나는 당당히 ‘삼선볶음밥’을 먹을 것인가.
알베르 카뮈에게 눈을 돌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인간성의 회복과 존속’이다. 시기적으로 ‘시사평론’이 카뮈의 사상적 완결성을 가진 작품이라 볼 수 없으나,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성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회복의 방안을 표면적으로 제시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거대한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틈을 비집고 들어간 단일 체제, 다시 말해 파시즘에 기반한 강력한 독재자의 또 다른 등장과 좌우로만 분리되어 기득권을 가져오기 위한 알력이 난립하자, 카뮈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양극 또는 거대한 단일 체제를 경계해야 함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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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과 단일성, 파괴되어 흩어진 인간 존재를 회복시킬 대안으로 보이나,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 또는 두 개의 주요한 사상적 흐름에 묶어버리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기반한 움직임이었다. 카뮈는 이러한 시대적 사조를 정치로 보지 않았다. 과거 왕정 시대로 회귀하는 통치적 행태는 배타적 국가와 개인을 양산해 또 다른 파괴를 불러내는 일종의 ‘영원회귀’로 보았던 것이다.
프랑스어로 ‘시사’는 ‘actualité’이다. 그러나 카뮈가 명사인 ‘actualité’로 명명하지 않고 형용사인 ‘actuelle’을 도서명으로 정한 이유, 그것은 정치가 가진 속성을 지극히 여긴 탓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떠들어댈 수 있는 그 자유분방함, 시끄러움, 이것이 모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행태로서 영위되어야 할 삶의 가치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