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후의 턴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지는 풀꽃도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요?
풀 한 포기 없는 빈 땅에 비가 내리면?
비에 쓸어내려간 흉측스러운 언덕배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우울증도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요?
선희가 우울증에 걸려 찾아왔습니다.
선희는 정말 똑똑하고 착한 대학생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 아빠 속 썩인 일이 없었다니까요.
아빠는 선희에게 경영학과 스페인어 이중전공을 추천했습니다.
착한 선희는 아빠의 말을 따랐지요.
아무도 선희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졸업 후 취직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선희가 우울증에 걸렸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담을 해보니 우울증의 범인은 경영학이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은 경영학을 전공하다 보니
착한 선희가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까지.
경영학을 그만두고 스페인어에만 전력하기로 했습니다.
우울증에서 서서히 빠져나가 선희는
졸업 후, 스페인 통역사로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희에게 우울증은 가면을 쓴 축복이었습니다.
싫어하는 것들을 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요.
견디기 힘든 일이 있으실 때는
혹시 그게 -가면을 쓴 축복-일지도 모르니 살그머니 벗겨보세요. '
이 글은 나를 잘 알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개인 블로그에 올리신 글이다.
난 금세 알아차렸다.
'내 얘기구나.
이름만 선희지,,, 내 이름은 성희.
경영과 스페인, 홈쇼핑과 성지순례.'
퇴사를 앞두고 스페인 성지순례 다녀오고 나서 내 마음이 더 홈쇼핑과는 멀어졌을 때,
더 깊은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던 그때,
때 마침 나는 선생님을 만나 뵙고 여러 가지 고민을 말씀드렸었다.
그리고 한 달 후, 15년 가까이 정든 00 홈쇼핑에서 쇼호스트로서 마지막 방송을 했다. 마치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섭섭함과 설렘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을 졸업식처럼 쿨하고 훈훈하게 장식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마지막 방송을 함께했던 PD는 센스 넘치게 싸이의 '뜨거운 안녕'을 틀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시청자분들께 그동안의 감사인사를 드렸다.
방송이 끝나자 마치 졸업식 날 꽃다발을 받는 졸업생처럼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받으며 기념사진 찍고, 마지막 졸업인사를 했다.
“사실 제가 15년 동안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15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쇼 호스트가 나한테 맞는 길인가 늘 흔들리면서 일을 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이 일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고 했다면 훨씬 더 잘했을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하늘이 주신 기회니까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또 선배들이 하나, 둘 씩 나간다고 마음 흔들리지 말고요,, 저한테도 딱 좋은 변화의 타이밍인 것 같아요, 저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고.... 우리 함께 파이팅 해요~ 고맙습니다.”
그 꿈이 내가 그린 계획대로 빠르게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때 나는 기도를 통해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씀을 듣고 나왔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한 쇼호스트아카데미에서 부원장직을 제안받았다. 처음에 쇼호스트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녹록지 않은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모두 쇼호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혹시 내가 학생들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다른 회사로 옮겨서 쇼호스트를 계속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몇몇 지인들의 소개로 다른 홈쇼핑회사들과 얘기가 있었지만, 최종 결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진퇴양난.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다시 갈 수도 없고, 뭔가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에도 또 다른 기회가 있었지만, 깊게 고민을 하다가 마음을 완전히 돌렸다.
바로 선생님의 '가면을 쓴 축복'이라는 이 글이 내 마음속에 계속 또아리를 틀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한 참이 지난 후, 선생님의 이 블로그글에 댓글을 달았다.
"혹시 선생님~~~~ 이거 제 얘기인가요? ㅎㅎ"
그랬더니 바로 답을 주셨다.
"옛날 글을 용케도 찾았네,,, ㅎㅎ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이젠 내 인생 내가 맘대로 할 나이이니 걱정할 일이 뭐 있겠나.. 파이팅!!! "
그래, 역시 선생님은 어르신이다.
하늘의 뜻을 아는 50 지천명(地天命)을 지나,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한다는 60대 이순(耳順)을 지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더라도 절대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70대 종심(從心)의 나이.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하더라도 절대 법도를 넘지 않는 그 나이와 경륜이 몹시 부러웠다.
여전히 많이 흔들리면서 40대 중반에서 후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늘의 뜻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회가 올 때마다 기도하고,,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선택한 후에는
최선을 다하는 마음,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내 일에 임하려고 노력했다.
심하게 흔들리며 '불혹'을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지천명'이라는 말뜻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