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후의 턴
우연히 만난 TV속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젊게 살려면, 그리고 인생을 행복하게 마무리하려면 45세 이후에도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일을 계속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러면서 동료들과의 대화 이후 '쇼호스트라는 직업이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일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그 당시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감이 잘 잘 잡히지는 않았다. 아나운서, 리포터, 쇼호스트로서 방송만 20년 넘게 한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를 좀 더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었고, 회사 내에 처해진 내 상황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나는 상무님께 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상무님, 최근 몇 년간은 저도 의욕이 저하된 상태에서 일했지만, 앞으로는 다시 열심히 하고 싶어요! 방송 횟수를 늘려 주세요. 더 적극적으로 할게요. 하지만 만약 안 된다면, 저를 계약에서 풀어주세요!"
상무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앞으로 몇 년은 더 할 수 있는데... "
"사실... 다른 홈쇼핑에서 앞으로 경력직을 뽑을 예정이라고.. 옮길 생각도 있어요... "
물론, 머릿속으로는 몇 군데 옮길만한 회사들을 그려놓고 있었지만, 아직 확실히 정해진 곳은 없었다.
계약 시기를 한 달 앞두고 회사를 상대로 떼쓰는 아이처럼 굴다니... 지금 생각해도 참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계약은 끝났고, 나는 회사 규정보다 4개월을 더 연장하며 쇼호스트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부끄러운 나의 과거사를 밝히는 이유는 혹시 지금 회사를 옮길 생각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가끔 회사와 일에 지쳐있는 후배들이 나를 찾아와서 고민을 토로할 때, 나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얘기해 주곤 한다.
“네가 하는 일이 어때? 사람과의 스트레스 말고, 일은 재밌니? 일이 재미있다면 일단 그만두지는 마. 지금 하는 일을 하면서 너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찾아봐.
새로운 파트의 일을 해보거나, 아니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에 새로운 시도를 접목해 봐. 늘 하던 틀에서 탈피해서.. 처음에는 좀 힘들지 몰라도 다시 일에 대한 흥미가 생길 거야.
이것도 아니면 너의 시야를 회사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봐. 쇼 호스트 일을 하면서 너의 브랜드를 높일 수 있는 일을 해봐. 예를 들면 잡지에 화장품 리뷰를 하는 코너를 쓰던가, 유튜브를 하면서 동시에 너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을 함께 하는 거야. 아니면 새로운 것을 배워 보아도 좋고,, 성취감이 생기면서 너의 자존감도 올라가고 의욕도 생길 거야.
그런데 말이지, 그래도 이 회사가 영 너랑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다른 곳을 찾아봐. 일단 현재에 있으면서 미래를 탐색하는 거지. 다니면서 옮길만한 회사는 없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등등. 절대 대책 없이 관두지는 마. 회사를 옮길 때는 네가 현재 있는 곳에서 협상을 할 때, 훨씬 더 너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으니까.”
위의 경우는 일은 적성에 맞고 좋지만, 주변 상황이 나랑 안 맞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아예 일과 나의 적성이 혹은 나의 가치와 잘 안 맞는 경우다.
“만일 회사가 문제가 아니라.. 일이 문제라면 말이지... 나와 잘 맞지 않는다면.. 그때는 얘기가 좀 달라져. 무조건 참고 버텨보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라고만 할 수는 없거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도전도 해보지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잖아. 나만의 달란트를 찾아 나만의 꽃을 피워야 하는데 말이지. 난 현명한 경험은 절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 경험들이 어느 순간 모여서 네가 예상치 못했던 특별한 곳으로 너를 이끌 수 있거든. 하지만 지금까지 하던 일들을 그만두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면, 아마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너의 두려움이 너를 힘들게 할 거야. 내 판단이 맞나,,라고 스스로 의심하면서.
이럴 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너의 직관이 중요해. 어찌 보면 이성을 초월한 거지. 그래서 더 선택하기가 어려울 수 있어. 그러니 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돼. 몰입해서. '나는 지금 나 자신에게 솔직한가? 정직한가? 나의 직관을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나 스스로 지금보다 나는 더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가?' 만일 이 세 가지 답에 확신이 서지 않는 다면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돼. 왜냐하면 이 세 가지 답에 확신이 서야만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줄기 빛을 따라 믿음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길을 떠날 수 있으니까 말이지. 어떤 사람은 버텨서 더 큰 것을 얻고, 어떤 사람은 버릴 줄 몰라서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어. 그러려면 나를 잘 알아야 해. 지금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여기에 나의 이성과 직관을 동시에 잘 써야 해. 그리고 정말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아니? 바로 선택을 내가 한다는 거야.
내가 회사를 나오면서 한 가지 후회되는 점은 바로 내가 그만둘 수 있는 결정권을 회사에 주었다는 거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나의 미래를 말이지. 미래에 대한 준비가 덜 됐더라도 내가 그만두겠다고 확실히 회사에 얘기했더라면 훨씬 더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었을 텐데.. 그 당시 난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었던 거야. 회사에서 이 조건을 들어주지 못하면 나를 계약에서 풀어달라고 하면서 선택의 권리를 회사에 주었던 거야.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나의 권리를 말이지. ”
돌이켜보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어리석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때의 나는 참으로 미숙했다. 당시 주변에서는 상무님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회복하라는 권유도 있었고, 다시 계약을 하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회사와의 소통을 차단한 상태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사석에서 상무님과 만나 이때의 이야기를 웃으면서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었는지 모르겠다.
대신,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늘의 뜻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자문하며 간절히 기도했을 때,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말씀은 바로 '사람 낚는 어부'였다. 지금까지는 '상품'을 주인공으로 방송을 진행해 왔지만,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깊은 울림이었다. 또한,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가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는 이제 떠날 때야.’ 하면서 결연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하지만 한동안 내 결정에 대한 후회와 불안감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흔들리며 가는 마흔여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