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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by 나땅콩




그 커피 비싼 거니까 아무나 먹는 거 아니에요!


여기는 대중음식점 출입구,

갓 볶은 원두가 구르고 한 잔에 담긴 여유로움이 다만 사진으로 붙어있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네모난 이마, 이쑤시개를 상투처럼 이고 있는 인스턴트 자판기가 분명한데 이 집에서는 뭐가

그리 대단한 걸까?


그제야 번쩍~~ 생각났다


젊어서 엄청 예쁘셨겠어요?


어른을 놀리면 못써!


지난번에 엇박자, 화들짝 놀라 날아간 새가 다시 날아들었다

이 커피의 자존심을 천정부지로 끄잡아 올린 건 맹한 말솜씨를 구사하는 나

관계에 있어서 느려터지고 숙맥인 표현을 구사하는, 가끔은 비현실적인 언어로 상대를 당황케 하는 내가 어떠한 대꾸라도 해야 했으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말이라는 게 그렇다

소통을 위해 주고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경향성은 언제나 독백에 가깝다

혼자의 세계에서 주고받는 그것들로 대화를 시도하면서 교집합 내지는 공통분모를 찾다 보니 허점투성이이다

대화를 위한 말들에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화자의 말이 대부분이다

동병상련들의 대화라 할지라도 온전치 않다 서로가 어긋난다 미세하게 다르거나 결이 다른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각자의 경험이 난무하는 소란을 두고 너무 쉽게 소통과 공감을 퉁치기도 한다

언제든 샛길로 빠져 오해와 착각을 일으킬 만큼 부정확하다 불확실하다 물론 나 혼자의 소신이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려면

말이라는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반응을 보면 눈빛이나 몸짓 그 이상의 무엇으로 의미를 파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한다 또한 훌륭한 어르신이나 멋진 선생님을 만날 적에 '많이 힘들지' '괜찮아질 거야'라고 낮게 드리워지는 말씀 한 방에 눈물 콧물이 쏙 빠져나오기도 한다

말은 보이지 않는 공력을 수반할 때 기능적으로 좀 나은 가능성을 보인다


각설하고, 돌아간다


일명 천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친구가 부탁을 했고, 그녀의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이라는 친근함에 지나치게 서둘렀던 건지 어색한 만남을 하고 말았다

외모에 대하여 어설픈 평판을 건넨 나는 봉변인지 불호령인지를 겪으며 톡톡히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그렇게 나는 칭찬과 조롱을 갈라칠 줄 아는 기센 강원도 아줌마와의 거래를 텄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키우는 거위가 죽었을 때 내가 아끼는 하얀 닭을 거위 대신으로 그녀의 애지중지, 품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녀의 아들이 날라다 주는 오봉밥을 일꾼들과 나눠먹고 농장의 이런저런 일들을 손보기도 했으며

가끔은 읍내에서 점심 한 끼를 해결하려 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무뚝뚝하고 핑글러지는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여름이 새파랗게 돋아나는 주방 가스불과 앞치마의 땀내에 절고 큼직하게 썰어 넣은 두부가 들어있는 동태찌개와 쿰쿰한 청국장 냄새의 밀린 주문이 미끄러운 바닥을 피해 요리조리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두 해가 지났다


계분 한차를 싣고 갔던 그녀의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와 말썽꾸러기 손자가 해병대에 입대했다는 무덤덤한 혼잣말이 날개 달린 벌레처럼 부유하는 저녁 어스름, 메뉴가 적힌 흰 벽 아래에는 화분 두어 개가 나름 싱그러운 잎들로 반짝였다


억척스러운 저분에게도 꽃을 사랑하는 여심이 깃들어 있나?


그녀의 속내를 가늠케 하는 꽃들이 조금씩 커져 벽을 가리고 가끔은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는 혼자만의 날들을 궁금해하며 화초 곁을 지나는 얼마간이 지났다

개업 리본을 넥타이처럼 매단 화분들이 들어서고 화사한 꽃무늬 벽지로 도배한 지금의 자리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려가며 할미꽃처럼 환해져 갔다

주방을 보조하는 아줌마는 주인장인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며 식탁과 주방을 분주히 들락거렸고

그녀의 아들은 허리 접는 인사를 하며 들녘으로 열심히 배달을 다녔다


커피 한잔 먹고 가요!


소리가 담아내기에는 스스로 커진 함량의 말을 들었다 내게 와닿는 순간, 내 몸을 뒤로 밀리게 하는 밀도를 가진 말이었다

이제야 맘이 풀리신 걸까 돌아서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데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친함이 솜사탕처럼 부풀기 위해서는 이런 기로를 맞이해야 하는 것 같았다

혈관처럼 비좁은 경로를 흘러나와 비로소 인기척을 하는 오래된 여정이 반가웠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비싼 커피를 양해받지 않아도 되는 지척이 됐다

친근의 기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텃밭에서 자란 애호박과 정구지가 바구니에 담겨 우리 집 반찬에 오르고 명절에는 내손에 들린 계란이 그 집 제사상에 올랐다

군청 언덕에는 스포츠 센터가 들어서고 멀리서 온 유소년 야구단과 씨름선수들이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릴라치면 그녀는 신바람 난 목소리로 내게 주문전화를 했다


나는 그녀의 느리고도 우아한 변화를 식당 문턱을 넘나들면서 보았다 그러면서 이 땅의 많은 여인네들을 떠올렸다

나도 흠이 많지만 이 땅의 남편들은 어지간히 철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야채가게 아줌마도 그렇고 동구밖의 형수도 그랬다

산 세월이 고단해 보이는 건 남편 때문이었다

다들 남편 죽고 나니 오히려 신수가 훤해졌고 팔자가 나아져 보였다 물론 아내에게 잘하는 남편들도 많을 것이지만 내 주변이 그런 건지 유독 내게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엔가 식당을 내놓는다는 광고를 지역신문에서 보았다

나는 무슨 사정이 있는지를 물었다

구부정한 등과 기우뚱한 무릎의 그녀가 한숨 섞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매일마다 한 움큼씩 약을 먹었으며 관절에 좋다는 주사를 수도 없이 맞았단다

나는 그녀의 고운 은발과 더불어 긍정적이며 희망찬 삶의 태도에만 주목했음이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또한 그녀의 식당이름인 무궁화를 떠올렸다

성하의 한철, 지글거리는 도로의 열기를 식혀주던 근기의 화사함을 가진 그 꽃이 무슨 연유로 간판에 걸렸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은연중에 그 꽃의 이미지와 그녀를 일치시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떠나는 터미널 앞 식당, 타지에서 전지훈련을 하러 오는 체육인들이 많아질수록 신바람 나는 식당의 주인이며 올망졸망한 어린 선수들의 빈접시를 채워주고 승리와 선전을 기원하는 맘씨 좋은 노익장을 닮고 싶었던 부러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은 그녀를 나이 들게 했다

젊어서 바람을 피우고 무능력했던 남편을 대신해서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무게가 엄마의 기운을 다하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창이 고향인 그녀가 시집와서 그리워했던 만큼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뭔가 생각이 많은 한동안을 시무룩하고 무거워져서 말이 없는 채로 보냈다

혹시나 하며 살펴보는 지역신문에는 여전히 매매광고가 실려있곤 했는데 어느 날 보니 사라져 있어서 연유를 물어보았다


계약을 했는데 깨졌어!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지!


나는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삶은 일단락에 잠시 머무르는 것 같아도 멈추진 않으니까...

과정을 묘사하는 언어는 늘 미흡해서 뒤따르다가 볼일을 못 본다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대가로 흩어진다

삶이라는 허공은 모든 걸 내포하면서도 거두지 않고 깨끗하게 지울 줄 아는 지능을 가진 칠판이요 지우개 아니겠나?


나는 그녀에게 나이를 물었다


그건 왜 물어?


역시 까칠..., 역전에 용사다


저도 사장님처럼 되고 싶어서요


이제야 말다운, 한마디... 했다!


한때 그녀를 불통녀라고 오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로 인하여 이 땅에 할머니들을 다시금 새겨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뾰로통하고 앙칼 맞은 소녀가, 눈을 흘기고 외면하던 작은 아씨들이, 세상을 종횡무진으로

살려내는 뜨거운 활력이 점차로 낮아졌을 것이다


구릉처럼 편안해진 그녀들

경이로운 그녀들

신비한 아침이 매일마다 태어나는 건 그 덕분이 아닐까?

세상을 낳고 키운 어머니이자 할머니

오늘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무진한 그녀들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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