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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 아저씨의 상상력

웅 덩 이

by 나땅콩







가끔은 결리는, 그래서 욱신거리거나 얼얼해지는 상처라고 말했을 때에 그는 지금도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지만 아무래도 살다 보면 그런 일은 계속 내게 일어나지 않겠냐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발레리나의 토슈즈 같은 단어들로 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끈을 말아 던지는 팽이가 한자리에서 회전을 하듯 손목을 돌리면서

나의 두발이 멈춰 선 곳을 주목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왜요?


아픈 자리야!


그는 이제 무언가를 작정한 사람처럼 팔을 벌려 나비처럼 휘저었고 계절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철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녔다

펄쩍펄쩍 뛰어올랐으며 깃발이 되어 펄럭거렸다


그것은 마치 무공을 닦는 도인이거나 허들을 뛰어넘는 육상선수 같았고 밤샘 공부를 마친 수험생이거나 연구원 같았으며 고난도의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의 손놀림 보여주려는 동작으로 보였는데 갈피를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무엇을 설명해주려고 하는지를 물어야 했다

그의 목소리는 새벽잠을 깨우는 닭울음처럼 멀었고 귓속말 같아 너무 작게 들렸다


뭐라고요?


나는 왠지 비슷한 내용의 맛과 색깔들을 모아놓은 종합선물이거나 잔칫집 밥상에 오른 흥겨운 음식들이 한꺼번에 떠올렸다


아니, 아니야


웅덩이야!


그는 꾸준히 맴돌았고 삽질을 하면서 자신의 둘레를 넓혀갔다 물이 고이자 양동이를 가져와 퍼냈고 자꾸만 파내려 가는 시늉을 하더니

집 한 채를 너끈히 들여놓을 만큼의 커다란 구덩이를 생기게 했다 그의 말은 지치지 않아서 계속 파내려 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파트 한동을 삼키고 더 나아가 동네를 들여놓을 만큼의 거대한 지하공간이 순식간에 만들어지자

이마에 땀을 닦고 두 눈을 반짝이며

이만하면 됐으니 다음을 기대하라는 듯이 술사의 주문과 같은 말 한마디를 던졌다


비를 내려야겠군!


대지와 숲을 적시던 빗방울이 이내 굵어져

작은 내로 흐르더니 부유하는 많은 것들이 가장 낮은 곳을 찾아 떠밀려 왔다

그것들은 대개가 뿌리 없는 것이거나 약해진 것이었고 수명이 다했거나 벼랑 끝에 걸쳐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길에 실려 떠나온 물건들이 웅덩이에 가득 찼다 고약한 악취와 더러운 물빛이 번져서 물들었고 그것들은 차츰 썩어갔다


그는 코를 쥐고 떠나가는 사람들과 커다란 물웅덩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잠시 후 햇빛을 받아 바짝 말라가는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것이었다

토끼와 다람쥐 그리고 다리가 긴 새들이 날아오는 풍경이었다

누군가의 어항에서 살았던 금붕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무둥치에 올라탄 남생이는 졸고 있었다

물방개와 소금쟁이가 돌아오고 샘물처럼 맑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많은 뭍생명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거나 저수지의 어엿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동안 많이 아팠던 것은 이런 이유인 거야!



나는 그가 돌아가고 난 그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의 두발이 멈추었던 곳은 깊게 패여 있었고

그의 이야기가 그려 낸 그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이미 움푹한 웅덩이였다

수초들이 하늘거렸다 개구리 밥이 떠있는 저만치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무리 지은 연꽃과 수련들이 수면 위를 수놓고 있었다

오랫동안 서서 바라보다가 어느새 이슥해졌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들고 밤하늘이 뭍별들로

가득 찼다

나는 아래와 같은 높은 데를 보며 말했다


누구의 웅덩이일까?


오늘따라 하늘 참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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