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 일곱 시 삼십 분, 밤근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겠거니 시계를 보며 통화를 이어간다
근무 중에 생긴 일들이 발을 내디뎌 허공을 가로지르며 내게로 온다
가쁜 숨결, 이어지는 하품소리에서
분주했던 지난밤의 냄새가 난다
도심을 걸어가는 출출한 시장기가 김밥집과 베이커리의 간판에 닿고 뜨거운 김 서린 국밥의
창문 안을 살핀다
아빠, 그 환자 있잖아?
나는 내게 참새처럼 쫑알대며 와닿는 얘기들의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중환자실의 소통은 대개 의학용어여서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귀동냥한 몇몇으로 듣고 유추할 뿐이다
게다가 나의 청력과 기억력은 예전에 내가 아니다 온전치 않다 내게 전달되는 정보를 그때그때 저장하고 필요한 만큼 뽑아 쓸 순발력이 없어 보인다
또한 나의 이력은 이렇다 할 병원 신세를 진적이 없어 낯이 설다
내 몸의 상태를 묻는 의사의 질문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잠시라도 머물러 있게 되면 무엇엔가 잠식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자꾸만 출입구로 돌아나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귀 기울여 듣고 또 가끔은 잘 이해하는 척을 하면서
조언 비슷한 걸 남발하고 꼰데로서 위상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동기가 해 준 얘기야!
신중한 목소리가 한밤중을 향해가는 어느 늦은 저녁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면회를 대기하는 의자에 고개 숙인 한 여자가 앉아있다
깊은 슬픔을 감지한 간호사가
고통스러운 심경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위로를 전하려는 중이다
오늘은 면회시간이 끝났습니다
내일 오셔야 할 것 같네요 여기 이렇게 계신다고 환자가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것이 환자분이나 보호자를 위한 일이 아닐까요...
나는 안다
순간 알고 문득 안다
내 딸이 내게 전하는 이 소식의 이유를 알고
그 시간 공기의 밀도와 정적을 알고
그 암담함과 무기력을 알고 깊게 파내려 가는 한숨을 알고
밤이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를 알고
사람이 건네는 목소리에 터져 나올 애원을 알고
내 나이쯤인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참담한지를 안다
눈을 베이는 서슬 퍼런 운명을 알고
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절차를 알며
남아서 감당해야 하는 그리움의 무게를 안다
나는 나와 그녀 사이를 통과했을 암담한 시간의 터널을 좀 더 환하고 덜 아프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구사할 수 있는 표현이 내게 없어서 멈칫거렸다 그러는 중에
어른들의 슬픔을 설명한 어떤 시인이 떠올랐다 나는 그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빌려 그녀의 심경을 전달해보려 하였다
가세가 기울었다더군.. 거처가 없어진 어머니를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리면서... 고기가 들어있는 뜨끈한... 식당에 간 거야.......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데.... 깍두기........
야! 안 되겠다
나중에 보내줄게
나는 서둘러 사태를 진화하려 했으나 흐름이 되돌려지지 않았다
아빠의 눈물에 익숙한 딸은 저도 뭔가 짠해졌는지 나중에 통화하자며 대화를 마쳐 주었다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별안간 상세한 기억이 펼쳐졌다
조카이거나 딸아이만큼, 어린 간호사 앞에서
오열했던 그녀의 나중이었으며 남편과 이별하게 된 한 달 남짓한 후일담이었다
의료진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올 그녀를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했었다 마지막이 될 부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쳤고 불가능에 가까운 임종면회를 안겨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고 들었던, 그날의 긴박한 순간들이 그제야 당도한 것이었다
나는 중환자실 간호사의 아빠이다
딸은 내일도 모레도 퇴근할 것이며 집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때마다 인상 깊은 그녀의 하루는 휴대폰을 통해 내게 건너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내게도 약속된 때가 오면
우리 둘은 언젠가 환자와 보호자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나는 손님이고 싶다
한때는 가족이었던 내가 소중한 추억의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미소 지으며 잘 있다 간다는 작별인사를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또 바란다
세상의 많은 자식들과 부모들에 격이 없어서 모두가 여기에서는 다만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눈물로 나를 보내 줄 나의 손님에게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