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면 매 출근 때 마다 처음 보는 상사, 동료, 고객들과 일을 한다.
그래서 출근할 때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고, 비행 중 친해지게 되면 자신의 삶의 한 귀퉁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기회가 생긴다.
그 때 만났던 동료 승무원 분들이 내게 종종 이런 질문들을 한다.
어쩌다 악기 연주하다가 승무원을 하게 됬어요?
대학 때의 전공을 계속 살렸다면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음악 교육 대학, 음악 치료와 같은 비슷한 분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술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독일 국립음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 이후, 더 이상 내가 꿈꾸던 모습으로 음악을 해나가기 어려운 현실이 펼쳐졌다.
여러 번의 대학원 시험 낙방,
오케스트라 단원 오디션 낙방,
그리고 보통 인맥으로 시작하게 되는 전공생 악기 레슨을 시작하게 도와줄 인맥이 해외에서 대학을 졸업한 내게는 없었다.
1년 정도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정말 우울했고 이런 깨달음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일류 연주자가 되기는 어렵겠구나.
클래식 연주자로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중동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며 독일 베를린에 비행을 갔을 때, 대학원 시험을 봤던 학교 중 한 곳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학교에 떨어져서 좌절했던 지난 시절이 생각났다.
만약 대학원에 합격했다면, 난 외항사 승무원이 될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고민과 어두움은 내가 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방황을 하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항공사 승무원에 대해 추천해 주셨다.
다른 사람의 직업이 아닌 ‘내 직업으로서의’ 승무원이란 사실 매우 뜬금없는 것이었다.
10대 시절부터 내가 유일하게 꿈꿔온 진로는 클래식 연주자였기 때문에.
그런데 신기하게도 처음으로 오랫동안 불이 들어오지 않던 내 머릿 속 전구에 드디어 불이 딱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음대 재학 시절, 나는 똑같은 것에서도 다른 음대생들과 관심 가는 분야가 조금 달랐다.
교회에 다니는 음대생들은 교회 예배 시간에 자신의 악기 연주 재능을 활용해 예배 음악 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왠지 모르게,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을 돌보는 지도 교사 봉사에 관심이 갔다.
6개월 정도의 시간동안, 솔직히 음대생으로써 음악 연주 봉사하는 것보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미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람은 악기 연주 봉사를 할 때보다 더 컸다.
연주를 보러 공연장에 가면 무대 위의 연주자 뿐만 아니라 공연장의 관객들을 서비스하는 하우스 어셔 (공연장 안내원)의 업무에 관심이 가기도 했었다.
(승무원 준비를 하면서 서비스 경험을 쌓기 위해 나도 공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볼 기회가 있었다. 공연장 안내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써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내 모습을 되돌아보니, 대학 전공은 음악이지만 누군가에게 음악 연주로 감동을 주는 일보다 누군가의 필요를 돕는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가가 되는 것은 악기를 전공한 10년간의 익숙함의 세월을 이어가는 길이었다.
10년간 음악을 전공한 내가, 예체능 분야 대학을 졸업한 내가 20대 중반에 항공사 승무원 취업을 준비하는것은 반 평생의 삶을 뒤로 하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가로 비유하면, 새로운 악기를 20대의 나이에 처음 소리 내는 법부터 배워 몇 년 안에 전공자 수준의 연주 실력으로 익혀야 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
음악가에서 승무원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정한 후 2년 간의 면접 준비, 영어 공부의 준비기간 끝에 현재 일하는 항공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현 직장에서의 근무 기간이 쌓이며, 항공업계 종사자로서 항공, 여행 업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준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며 외항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마음가짐이 처음과 다를 때도 있고 때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음악가에서 승무원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 내겐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이자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음악을 전공하다 승무원이 되었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전공을 직업으로 이어가는 것보다 좀 더 나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도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