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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 Jul 03. 2021

1-(1) 제 직업은 프로 사랑러입니다.

깊고 풍성한 울림이 있는 삶을 위해


 "1억 원짜리 수표를 마구 구겨서 짓밟은 채 바닥에 던져두면, 아무도 안 가져갈까요? 그렇죠. 아무리 구겨지고 짓밟혀도 1억 원의 가치는 변하지 않아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아무리 욕하고 비난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가치는 변하지 않아요." 

내가 힘주어 말했다. 

"쌤, 아니에요. 저 코로나 때문에 맨날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잠만 자서 올해 진짜 멍청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수학 학원 선생님한테도 혼났어요." 

6학년으로 진급할 때, 암묵적으로 왕별(그 해 담임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킨 학생을 지칭하는 말)을 달고 올라온 우리 반 여름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름이의 말속에서 나의 두려움이 거울처럼 반사되자, 울컥한 나는 여름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더욱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여름이는 1억이 뭐야, 1000억. 1000조를 줘도 절대 바꿀 수 없는 훨씬 더 귀한 존재인데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평가한다고 해서 여름이의 가치는 변하지 않아. 여름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남들이 별생각 없이 내뱉는 평가에 주눅들 필요 없어. 여름이에게는 여름이만의 대체 불가능한 힘이 있어." 

그 순간 여름이의 놀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눈빛에서 며칠 전 나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


 작년은 내가 교직 생활을 한 지 7년째가 되던 해였다. 학교생활에 대해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며 매너리즘에 살짝 빠진 시기이기도 했다. 동시에 내면 깊은 곳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유능한 교사라면 어떤 성향의 학생을 만나도 의연하게 행동하며 그 학생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난 아직 그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신학기를 앞두고 새로운 반을 뽑을 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 없이 순하고 성실한 아이들만 명단에 있기를 기도하니까.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아직 역량이 부족한 나에 대한 자괴감이 이따금 불쑥불쑥 올라왔고, 어떤 학생과도 잘 지낼 방법이 없을까 남몰래 고민을 해왔다.


 그해 4월, 책으로 우연히 만난 '버츄 프로젝트'와 '권영애 선생님'은 이런 나의 교직 인생에 있어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빈 교실에서 '자존감, 효능감을 만드는 버츄프로젝트 수업'이라는 책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서 수도꼭지가 콸콸 틀어졌다. 책 속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문장들이 무뎌진 나의 감정을 사정없이 흔들며 눈물, 콧물을 쏙 빼놓았다. 이 책은 분명히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야기인데 희한하게 내 안에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런 교실이 가능해? 선생님과 학생이 이렇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성장하는 교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소설에 나올 법한 교실이잖아.' 하며 놀랐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나도 이런 교실의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책에 이어 권영애 선생님의 30시간짜리 인터넷 연수를 듣다가 더욱 감화된 나는 오프라인 워크숍을 신청했다.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몇 차례 연기된 끝에 10월의 마지막 날 워크숍이 열렸고, 그날 권영애 선생님의 에너지를 직접 접한 후로 버츄 프로젝트의 철학 및 효과에 대한 내 확신이 더욱 공고해졌다.


 열정적인 강의를 하시던 권영애 선생님께서 한 번은 내 이름을 예시에 넣어 설명하신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조민혜 선생님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 있어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반짝반짝한 빛이 조민혜 선생님 안에 있으세요."

오.. 마이.. 갓.... 

살아오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머릿속이 맑아지며 각성한 느낌이 들었다. 마스크 위에 얹힌 내 눈은 예상치 못한 놀라움에 동그랗게 확장되었다. 권영애 선생님의 확신에 가득 찬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날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가슴이 뛴다. 여름이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걸까?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하지만 정답 또는 진리 비슷한 것은 있다고 믿는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교실에서 버츄(미덕) 프로젝트를 반드시 실천해야만 한다'였다. 내가 이해한 버츄 프로젝트 철학을 간단히 설명하면


1. 아이의 변화는 스스로 선택했을 때만 가능하고, 아이에게는 이미 그럴 수 있는 능력(버츄, 미덕)이 내재해 있다.

2. 교사가 아이를 지지할 방법은 아이의 내재한 능력을 믿고 한결같은 사랑과 용기를 주는 것뿐이다.


 그렇다. 아이(학생)에게는 무한한 잠재 능력이 있고, 어른(교사, 부모)가 할 일은 아이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것뿐이다. (단, 꽤 묵직한 조건이 붙는데 '변함없이. 한결같이' 믿고 사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이가 문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해결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만 한다. 즉, 버츄 프로젝트는 기법이 아닌 철학, 에너지, 아이들에 대한 사랑, 아이들 존재를 다르게 보는 패러다임이다. 교사는 가르치고 교정해 주는 사람이 아닌 교실의 가장 큰 환경으로, 거울처럼 아이들의 가능성을 비춰주는 사람이다. 교사의 머리에 지식과 정보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의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과 진심이 가득 차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와 교사의 마음이 연결되지 않으면 어떠한 획기적인 수업 기법도, 휘황찬란한 수업자료도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미미할 뿐이라는 것을 지난 7년간 뼈저리게 느낀 나는 이 철학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보이는 모습은 1%도 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의식은 오감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무의식에 비하면 정보의 저장량 및 인간의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은 의식보다 28만 배 이상의 정보를 저장하고 인간의 의사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무의식을 교실에서 '큰 나'라고 이름 붙여 설명한다. 이 '큰 나'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도 몽땅 다 저장이 되기 때문에 매 순간 큰 나에 어떤 기억을 저장할지 생각해 보고 판단하라고 일러준다. 평소 '큰 나'에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야. 나에게는 용기가 있어.'등이 저장되어 있다면 '큰 나'가 친구관계, 공부, 운동, 꿈 이루기 등을 할 때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큰 나'에 '나는 못해. 해봤자 소용 없어. 나는 쓸모 없는 존재야. 희망이 없어.'를 저장하면 '큰 나'는 본인이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 역시 아이들의 '큰 나'에 모조리 저장되기 때문에 수치심을 주거나, 좌절감을 느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사랑과 감사, 존중과 배려가 바탕이 된 말과 행동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즉, 교사는 학생의 보이지 않는 '큰 나'인 무의식에 어떤 체험을 줄 것인지 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사는 학생을 무한한 잠재 능력을 갖춘 존재로 바라봐야 하고, 학생들의 강점, 장점, 재능, 가능성을 발견해서 끊임없이 비춰주어야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으며, 문제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도전할 가능성이 커진다.



 학생들의 무한한 잠재 능력을 비춰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미 미덕(버츄)을 가지고 있고 그 미덕을 언제든지 깨우고 사용할 수 있다'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미덕에는 사랑, 감사, 존중, 배려, 신뢰, 목적의식, 열정, 끈기, 평온함, 용기, 청결, 정리 정돈, 초연함, 자율 등 대표적으로 52가지가 있다. 아이들의 마음의 광산에는 이미 이 미덕들이 있고, 이 미덕을 깨우기만 하면 된다. 대신 교사가 깨워줄 수는 없다.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그 미덕의 원석을 반짝반짝 빛나게 연마해야 한다.

 

 우리가 한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한 사람만 떠올려 보자. 100% 미덕 부자일 것이다. 가령, 김연아 선수를 생각해 보면 이상 품기, 목적의식, 한결같음, 탁월함, 끈기 등의 미덕이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다. 유재석 씨를 생각해 보면 신뢰, 화합, 책임감, 근면 등의 미덕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생각해 보면 창의성, 끈기, 소신, 열정 등의 미덕이 잘 계발된 분이다. 세종대왕이 명나라와 신하들의 반대에 굴복해서 한글을 만들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글 버금가는 창작물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훈민정음 창제의 계획이 무산된다고 하더라도 세종대왕이 가진 창의성, 끈기, 소신, 열정 등의 미덕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경제 공황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일푼 백수가 된 사업가가 있다고 해도 52가지의 미덕이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소신의 미덕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목적의식과 열정 미덕을 발휘해서 다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신뢰와 책임감의 미덕을 지켜봐 온 주변 사람들이 도와줄 수도 있다. 또 창의성과 유연성의 미덕을 사용해 시대가 요구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 상품으로 재기에 성공할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만난 짧은 시간 동안 배우다가 휘발되어 버리는 얕은 지식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사랑할 힘을 키워주고 싶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만나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선택해서 해결 방법을 찾아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정말 그런 사람의 아우라는 눈부시게 빛나지 않은가. 사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미덕 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에너지는 '사랑'이다. 사랑의 에너지를 발휘할 때, 사람에게서는 가장 아름다운 기가 나오며 100m까지 간다고 한다. 훈계나 꾸중이 아닌 사랑 에너지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게 돕는다. 나는 다짐한다. 아이들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스스로 변화하는 체험을 제공하겠노라고. 하지만 이것을 지속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때 나에게 필요한 미덕이 끈기, 한결같음이다.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바쁜 일이 몰려 마음이 급하거나, 특히 같은 말을 반복해도 행동 변화가 없어 보이는 학생을 마주할 때면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온다. 변화가 느린 아이도 한결같이 기다려주기 위해서는 뻔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내 사랑의 곳간이 비어 있다면 남에게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 오히려 내 것을 뺏기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여 예민하게 굴게 된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체험을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다르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애쓰지 않아도 진정성과 열정이 담뿍 묻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교사라서 참 좋다. 의무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직업이라 감사하다. 돌려받을 수 있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먼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직업이라 마음이 편하다. 아이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기 위해서 나를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해서 좋다. 함께 성장하고 감정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라 특별하다.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변화하는 기억을 선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도 종종 있지만, '내 직업은 교사니까. 내 소명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거니까.'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머릿속이 정리되고 다시 힘이 난다. '나와 아이의 무의식에 무엇을 넣을래?'라고 생각하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사랑을 선택할 용기가 생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 순간에 사랑한 기억이 많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내가 가장 많은 사랑을 주고, 진심 어린 사랑을 전달받았던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며 내가 만나고 사랑할 아이들이 아주 많아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교단에 서는 것이 일로만 느껴지지 않고 나의 인생 소명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여겨져 더욱 의미 있게 여겨진다. 아직 나도 배우는 과정이 있지만, 언젠가 100% 진심으로 나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저는 학생들에게 지식 전달자가 아닌, 사랑/변화 체험 전달자가 되겠습니다.

아이들 영혼 하나, 하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바라보고 사랑해 주겠습니다.

변화가 더딘 아이도 믿고 기다려주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사랑 에너지로 가득 채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영혼을 사랑으로 흘러넘치도록 채우고 다른 존재와 진심으로 만나서 

깊고 풍성한 울림이 있는 삶을 가꿔 나가겠습니다.

           

-2020년 10월 마지막 날, 버츄 워크숍을 마치고 쓴 다짐 글 중-





*학생들과 있었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학생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사진 출처 : yes24, 한국 버츄 프로젝트 홈페이지, 아이스크림 연수원 미덕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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