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려는 자, 언행일치의 무게를 견뎌라.
3학년 1학기 과학에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한살이 과정을 관찰하는 내용이 나온다. 좁쌀만 한 알이 붙은 케일 화분과 사육 상자를 받아든 날, 기필코 이 어린 생명을 책임지고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상했다. 햇살 따스한 어느 봄날에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학교 화단으로 나간다. 이윽고 사육 상자 문을 활짝 열면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서 꽃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고, 그 장면을 본 아이들은 손뼉 치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는 그런 동화 같은 장면을.
며칠이 지나자 다른 반 케일 화분에는 애벌레가 하나둘 부화했다. 돋보기로 샅샅이 살펴도 애벌레가 보이지 않아서 '우리 반은 애벌레가 한 마리도 깨어나지 않은 건가'하며 초조해했는데, 희한하게 케일 잎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갔다. 숨바꼭질의 대가 애벌레들은 케일 잎이 거의 다 사라지자 그 퉁퉁한 모습을 드러냈다. 케일 화분이 총 3개나 있었는데 대식가 애벌레들이 거의 다 먹어 치워 버려서 케일은 점점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흐르자, 몇몇 애벌레는 실을 뽑아내어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될 준비를 하였다.
아직 번데기가 되지 않은 나머지 애벌레들이 먹을 케일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애벌레가 거의 다 컸고 몇 마리 남지 않아서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모른 척하려고 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애벌레 먹이까지 신경 쓰기가 귀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빼빼 마른 애벌레들을 보니, 생명한테 못할 짓인 것 같아 마음 한편이 계속 걸려, 저녁에 케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의 마트나 시장에는 케일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 마트에서 유기농 케일을 얼른 구매했더니 다음날 얼굴 두 배 만한 케일 잎이 한 뭉텅이 도착했다.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학교에 가져와서 우리 반 사육 상자에도 넣어주고, 다른 반 선생님께도 나눠드렸다. "제발, 너희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 원래 먹던 것과는 달라서 낯설겠지만, 유기농이니까 많이 먹어." 다행히 그 후 애벌레는 초록 똥을 많이 쌌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들과 함께 다 자란 나비가 자유롭게 훨훨 나는 장면을 가슴 뭉클해 하며 볼 수 있었다.
애벌레가 건강하게 자라서 나비가 되길 마음속으로만 간절히 빌어봤자 소용이 없다. "애벌레야, 사랑해.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자라렴." 말하며 바라보기만 한다면, 더는 먹을 것이 없게 된 애벌레는 굶어 죽을 것이다. 케일을 어떻게든 구해서 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지 않을까.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반복한다면 자식은 절대 그 사랑을 느낄 수 없다. 자식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자식이 행복해하는 것을 기꺼이 줄 수 있어야 그 사랑이 전해진다. 석영중 교수님께서 톨스토이의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해설하셨던 유튜브 강의 내용이 이러한 내 생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공상적 사랑은 생각에 그치거나 말로 하는 사랑, 감정적 사랑, 기분 좋은 사랑이지만 내가 힘들 때 언제든지 멈출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실천적 사랑은 책임과 의무이며, 내 온 존재로 하는 사랑, 나를 버리고 희생해야 하며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 실천적 사랑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사랑이며 견뎌내야 하는 것이자 중노동이다."
우리에게는 공상적 사랑(Love in dreams)이 아닌,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s)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늘 자연스럽지만은 않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왜 사랑 타령을 하지만 한결같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할까'하는 자괴감에 빠졌을 때, 교수님의 말씀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강연을 듣던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리 반 아침 인사는 "사랑합니다."이다. 이 말을 크게 하는 아이도 있지만, 아직 머뭇거리는 아이들도 많다. 예전에 맡았던 3학년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갈 듯이 "사랑합니다!!" 인사했었는데 왜 그럴까, 고민해 보았다. '코로나 때문에 매일 학교를 나오지 않아 서먹해서 그런가 보다.' 또는 '코로나 이전처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손잡아 주는 스킨십을 많이 할 수 없어서 그런가 보다.' 스스로 합리화를 위한 답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씁쓸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거리 두기 때문에 각자 자리에 떨어져 앉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아이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쉬는 시간도 거의 없고, 모둠 활동이나 짝 활동도 거의 하지 못한 채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이 거의 없는데 전달해야 할 것이 많아 바쁘고, 어차피 모둠 활동은 어렵다는 핑계로 수업 준비를 평면적으로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했다. 재밌는 수업을 준비해서 아이들이 마음껏 지적으로 뛰어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 중요한 사랑 표현법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말로는 계속 사랑한다는 인사를 하지만, 그 마음이 닿지 않은 학생이 많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표현한 사랑이 상대에게 당연히 전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상대는 전혀 느끼지 못하다니, 비극적인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신경질 나는 일 중에 하나가 주문한 택배가 잘못 배송 되었을 때가 아닐까. 택배가 오배송 되는 경우는 다양할 것이다. 택배를 잘 받았지만, 택배 상자 안에 물건이 없거나 내가 주문한 적이 없는 물건이 들어있는 경우, 또는 택배가 아예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다. 택배를 보낸 사람은 이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잘 보냈다고 흐뭇해하며 착각할 수 있다. 내가 보낸 사랑도 이렇게 오배송될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을 보낼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준비해서 상대에게 '먹히는' 사랑, 상대방 마음이 '동하는' 사랑을 보내야 한다. 귀찮을 수 있지만, 상대에게 정확하게 사랑이 배송되었는지 확인하고 피드백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애써 보낸 사랑도 공중분해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 또한 중요한 것이다.
"왜 또 숙제 안 해왔어." "자리에 똑바로 앉아." "글씨가 이게 뭐야." " 욕하지 말랬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의 잘못된 점을 모조리 수정해 주는 것이 교사의 의무라 생각하는 교사가 많다. 이 사례는 택배 상자에 물건이 잘못 들어간 경우이다. 아이는 이런 지적과 훈계를 주문한 적이 없다. "우리반 칭찬 스티커를 100개 다 모으면 과자 파티를 합시다!"
아이들이 행복해할 만한 약속을 남발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택배 상자가 텅 빈 경우겠다. 상자를 보고 기대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기만 해서 상대에게 더 큰 실망감만 안겨준다. 택배가 출발하려다 멈춘 격이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해.'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택배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급식실 가기 전, 영준이가 유리 물병이 든 주머니를 돌리며 장난치다가 옆반 복도에서 병을 깼다. 솔직히 '3학년 급식 시간 끝나가는 이 바쁜 때에 하필 다른 반 앞에서 병을 깨다니, 골치 아프군.'하는 생각이 올라왔고, 줄 서 있는 아이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하..." 하는 깊은 탄식을 뱉었다. 유리병을 치우면서야 "괜찮냐."라고 물어보았다. '괜찮냐고 너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아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도 이 일이 마음에 걸려 계속 생각이 났고 강한 후회로 남았다. 또 하루는, 체육시간에 줄 서서 돌아오는 길에 형진이가 계단에서 장난치다가 넘어졌다. '계단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화가 났지만, 과거의 후회를 떠올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형진아, 괜찮아?"라고 물었다. "네..." 장난꾸러기 형진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화를 버럭 내서라도 위험한 행동을 뜯어 고쳐주는 것이 형진이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선생님이 계단에서 장난치지 말랬지!"하며 소리쳤을 지도 모른다. 친구들 앞에서 야단맞는 아이가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아이를 위하고 사랑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더니 "괜찮냐"라고 묻게 되었다. 만약 내가 운전하다가 차 사고가 났는데,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누가 잘못했는지만 따지고 차가 괜찮은지 수리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하고 아무 말 않는다면, 화딱지 나고 폭풍 서운하지 않겠는가.
진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은 텔레파시가 아니다. 적절한 사랑의 총알을 '선택-조준-발사!'해서 상대의 가슴에 정확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메다꽂아 주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내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사랑이 흘러넘치는 자연스러운 단계가 되려면 아직 연습이 좀 더 필요하다. 하지만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실천적 사랑은 원래 어려운 법이거늘. 나 자신에게도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행동으로 잘 보여주며 언행일치하고 있는지는 아직 자신이 없지만 노력 중이다. 한 가지 예로, 학교에서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다는 핑계로 물을 너무 안 마신다.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를 위해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 주어야겠다. 말로만 사랑을 속삭이는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학생들과 있었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학생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