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노쇠함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 바꾸기, 교회를 변화시키기, 교회의 변혁, 아니면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교회.
어떤 단어와 문장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교회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VUCA[1]로 불리는 외적 변화 속에서 오래된 운영 방식을 놓지 못한다면 결국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우리는 직감하고 있다.
이미지출처 : https://microbit.slps.tp.edu.tw/courses/csintro/algorithms/unplugged
일반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모델은 어떤 장치가 입력(I)을 받아 일정한 처리 과정을 거쳐(P) 결과를 내는(O)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조직이나 기업을 분석하고, 변화와 목표 설정을 새롭게 하는 데 있어 자주 사용하는 모델이다.
조직은 자신이 가진 자본(I)으로 어떤 과정(P)을 거쳐야 기대하는 결과(O)를 얻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리고 결과에 따른 피드백을 두고 더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한 입력값(I)을 다시 찾아낸다. 필요하면 과정(P)을 수정해서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O)를 얻고자 한다.
우리도 이 모델을 사용해 보면 어떨까.
‘교회개혁’과 ‘변화’ 결과를 Out-put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P)을 거쳐야 할까. 이 Process가 우리 행동과 실천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Process의 ‘실천적 모호함’을 떨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교회가 개혁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거나 없다는 표현보다는 너무 많아서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서적과 매체를 통해 ‘이렇게 하면 당신의 교회가 변화하고 성장한다’라는 주제가 차고 넘친다.
문제는 ‘교회개혁’이라는 결과가 가지는 의미가 ‘광범위’하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어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고, 하나의 의미 안에 또 다른 의미와 대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우 단순하게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Process를 쓰면 반드시 내가 기대하는 Out-put이 나올 것이라고 맹신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성의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교회 비즈니스가 등장했다. 마치, 이 훈련만 따라 하면 교회가 변화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들 말이다.
이야기를 더 해보자.
자녀가 배가 고프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부모는 ‘알았어’라고 답한 다음 옷을 챙겨 입고, 문밖으로 나가버린다. 황당한 자녀가 묻는다. ‘밥을 해줘야지 어디를 가시나요?’
부모는 지금 자녀의 식사를 위해 시장에 다녀와야 한다고 판단해서 행동했으나 자녀는 부모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자녀가 생각하는 결과는 배고픔을 해결할 식사라도, 부모가 생각하는 결과는 자녀의 식사를 위해 준비해야 할 다양한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과는 식사지만 이에 대한 해석과 그 과정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둘의 과정 중 어느 하나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해석과 need에 대한 차이가 가져다주는 해결 방법이 다를 뿐이다. 이후에 밥을 하는 과정도 다르다 쌀밥인지, 잡곡밥인지, 불리고 할 것인지 그냥 바로 할 것인지 다르고, 국을 끓이는 것도 재료에 따라 과정이 다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권위주의를 벗어난 교회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이 결과를 얻기 위한 우리의 과정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대화인가? 정관과 제도를 만드는 것인가? 둘 다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것이 먼저인가? 목사에게 집중된 권한을 모조리 뺏으면 권위주의를 벗어나는가? 어떤 교회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하자. 그 교회의 과정이 우리 교회에 꼭 맞을 것이라는 확신하는가? 우리 교회도 그렇게 따라 하면 다 잘될 것이라는 기대는 망상에 가깝다.
권위주의만 벗어나면 교회개혁이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교회의 행동을 기대하는가?
사회적 약자라는 그룹 안에도 여러 지형이 있다. 자본에 의해 쫓겨난 사람,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 유린당하는 인권에 소외되고 배제당한 사람, 피부색과 지향에 따라서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도 있다. 이들에 대한 행동의 결과(O)를 위해서 실행하는 과정(P)은 너무나 다양하다.
우리의 실수는 교회개혁이라는 결과에 대한 프로세스를 단선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다 잘될 것처럼 여긴 것, 이것만 바꾸면 교회가 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순진한 희망이다. 그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 앞에서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문제를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교회개혁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교회개혁은 원래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기력해지는 사람이 등장했고, 개혁을 바랐으나 개혁을 등지는 사람까지 생겼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것은 교회개혁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수많은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입력으로 지칭되는 개인으로서의 교회(I)와 공동체로서의 교회(I)가 서로 다른 만큼 과정과 방법의 선택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우리는 교회개혁에 대한 방법이 없어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것이며, 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알면서도 권위적 방식을 채택하고, 알면서도 돌보지 않고, 알면서도 환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선택’하고 ‘행동’하기 위한 ‘지혜’가 먼저 필요하다.
행동과 실천에 대한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저항하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방향은 지키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첫째, 우리의 관심은 경계 밖 사람들이어야 한다[2].
예수님은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을 그 양들을 이끌어 오시려고 한다. 그 일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우리는 경계 밖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환대와 경청과 행동을 보여야 할 때다. 미워하고 몰아내야 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우리에 들어야 할 사람이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루며, 화평케 하는 일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주노동자 문제, 다문화 자녀, 젠트리피케이션, 보호받지 못하는 하청 노동자, 그리고 수많은 존재가 함께 ‘우리’ 안에 들도록 행동해야 한다.
둘째는 관계를 깨는 행동이나 실천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평화의 복음[3]과 평화의 하나님[4]을 고백한다.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 평화로 펼치는 행동과 실천일 때 의미가 있다.
교회는 거센 권력과 자본의 물결에 물러서지 않고 저항한다. 이런 우리의 저항은 관계를 깨는 방식의 저항이 아니어야 한다. 공의와 정의에 하나님나라가 사랑과 자비의 방식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이라고 말한 마틴 루터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개혁을 위한 당신의 선택은 무엇이며, 행동과 실천은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위대하지 않아도 괜찮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감당할 만큼이면 족하다.
현장에서 함께 참여 하는 것이든, 누군가를 후원하고, 적은 금액을 보내는 것이든, 기도로 그의 영혼이 마르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이든 모든 행동과 실천이 필요하다.
지금 하라. 행동과 실천을 지금 시작하면 된다. 모든 성도가 이런 마음으로 움직인다면 교회개혁이 단지 꿈만은 아닐 것이다.
[1] 변동성(Volatile),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약어다.
[2] 요한복음 10:14~16
[3] 사도행전 10:36
[4] 고린도전서 1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