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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꼼 Nov 18. 2024

한국교회 안에서 [복수의 리더십]을 기대하며...

1.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의 내일을 생각할 때 암담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 한국교회의 오늘이 너무 암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개혁을 이야기할 때에 어떤 주제를 강조해야 할까. 딱히 한 가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그만큼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글은 필연적으로 써야 하는 당위를 넘어서 교회개혁의 과제 중 하나인 정치제도 특히 직분에 관련한 주제를 정리하면서 ‘복수 리더십’에 대한 짧은 단상이다 


제도적 교회에 대한 전반적 내용이나 최근에 등장하는 제도적 교회가 가진 폐쇄성과 차별성 논란에 대한 부분은 고려의 대상이 아님을 밝힌다. 


복수 리더십이라는 주제가 이미 제도적 교회를 모토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비제도적 교회에 대한 담론과 제도의 해체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직분에 관련한 이 주제가 제도적 교회와 비제도적 교회의 논란으로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부패와 악행이 제도적 교회에서 드러나는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과연 제도적 교회의 전부를 해체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은 할 말이 많다. 


나는 제도적 교회의 한계를 충분히 인정한다. 

레오나르도 보프가 지적한 대로 역사적 소명을 잃어버리고, 중요한 봉사와 섬김의 기능을 망각한 부분이나.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 위험성이 있다. 전제적으로 되려는 경향이나 비판을 억압하는 권력체제가 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존재한다.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액튼 경의 지적이 옳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제도적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성경은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제언을 남겨 두었다. 이 글은 그 제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복수 리더십’에 대한 부분을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나는 교회 조직화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는 교회 조직과 제도화가 과연 모두 배제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이후 역사 속에서 제도적 교회가 발전시켜 온 4가지의 정치형태를 소개하고 이어서 복수 리더십에 대한 부분을 논하고자 한다. 복수 리더십의 문제는 교회의 구성원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교회의 직분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소개하고, 끝으로 복수 리더십에 대하여 반론하는 이들이 가지는 항존직에 대한 부분을 다루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2. ‘교회 조직화’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로 적용되는 구원은 자연스럽게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론으로 나아간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것이 기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1].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의 강조점은 신자의 공동체로서의 무형교회가 아니고, 신자의 어머니로서 유형 교회, 즉 제도적 교회에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교회론을 비판하며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힘을 실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제도권 교회의 개혁과 갱신은 불가능하거나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에 교회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제도적 교회에 대한 회의와 냉소를 보내고 있는 현실이지만, 

나는 교회가 조직화와 제도화를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다. 


제도적 교회는 직분, 권위, 교리, 예전, 법과 전통 등을 가진 조직을 의미하는데 이런 제도적 수단은 공동체의 안정, 정체성, 선교, 섬김, 치리의 필요, 통일성 등을 제공한다. 사람들의 모인 공동체는 정보의 차이나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제도를 만들어 낸다 [2]. 제도는 그 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시대와 구성원에 따라 진보한다.


교회는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고 제도적으로는 서로 간에 관계를 이루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3]. 이 두 가지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기적 교회와 제도적·조직적 교회는 서로 간에 우월적이거나 종속적 관계가 아니다. 서로 수평적이며 대등한 위치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직분론 중 복수 리더십에 대한 논의의 시작함에 있어서 제도권 교회에 대한 해체와 부정의 시각으로는 이후 논의의 의미가 크지 않다는 점을 환기하며, 교회의 유기성은 각 개체가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유기적 생명의 약동이 있다는 점을 유념해 주길 바란다. 



3. 교회 정치 형태

성부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이 머리 되시고,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의 모든 일들이 덕스럽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다. 이 지혜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적절한 논의를 통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로써 교회는 몇 가지의 정치 체계를 역사 속에서 발전시켜 왔다. 


성경은 어느 특정한 정치 체계 ‘만’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역사 속에서 나름의 발전적 역사를 가지며 각각의 근거와 적절한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장로정치, 감독정치, 회중정치, 국가교회정치는 오랜 역사성과 논리성을 갖추면서 오늘에까지 발전되어 왔다. 이 중 어떤 정치 형태가 우월한가를 논의하는 것은 크게 의미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규정된 정치형태 가운데에서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정치 형태라고 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근본적 지침이 있다는 것이다. 


존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그 목적과 기능들은 교회의 머리에 의해 명령되며, 그분에 의해 그 수성이 결정되고, 그 직원이 계획되며 지명된다. -중략-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빌려 행하지 않는다면 감히 우리가 어떻게 그 몸에 손을 댈 것이며, ‘감히’ 우리가 어떻게 그 일들을 지도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인간의 지혜와 편의에 따라 치리되어서는 안 되며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치리되어야 한다 [4]” 


교회의 직분은 사도 시대부터 알려지고 세워진 제도다. 


직분을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가지는 기능 이상으로 

‘의미화’하거나 ‘영구화’하거나 ‘권력화’하는 것은 성경과 역사의 가르침이 아니다. 


오늘날의 정치제체가 사회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데에는 이런 직분의 이해가 불충분했거나 아니면 직분을 개인 신앙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교회 구성원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유효적 부르심에 응답하여 삶의 주인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연합한 ‘동등한’ 영적 지위를 가진 회심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동등하게 나아갈 자격을 가진 제사장이다. 누구도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따르지 않으며, 교육과 나이를 기준하지 않다. 동등하게 하나님 은혜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 [5]. 


우리가 만인제사장에 대하여 말할 때는 다음의 의미가 있다. 소위 교회 지도자로 구분되는 목사·장로·감독이 아주 특별한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며, 교회 구성원 모두가 제사장으로서 성령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동등하게 사용하며, 동등한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성령하나님의 사역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5. 교회의 직분

교회는 유기적이며 불가시적인 면이 있음에도 이와 함께 직분으로 구성되어 제도화된 구조로 되어 있다. 직분자들은 공적 리더십을 위해 공동체를 통해 선택되며, 계층적인 권위가 아니라 ‘기능적’인 권위를 가진다. 이 직분자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위해 부여된 권위와 권한을 행사한다. 

 

5.1. 직분의 구분

일반적으로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하여 직분의 구분을 4 직분 혹은 3 직분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개혁자 칼빈에게서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나타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를 교회를 시작하는 초기에 등장하는 임시 직분으로 생각하고 이후 ‘목사’와 ‘교사’만이 현재에도 이어지는 항존직으로 생각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도 ‘제2치리서’를 통해 ‘목사 혹은 감독·교사·장로·집사’의 네 가지 직분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언제나 있어야 하는 통상적인 직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목사 ‘와’ 교사로 이어지는 전치사가 ‘목사 곧 교사’로 이해되어 둘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성령강림 이후 신약의 교회에서 등장하는 ‘장로’와 ‘집사’가 성경에 등장함으로 오늘날 교회의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로 이해되는 3직의 개념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3개의 직분이 항존직이라고 명하고 있다. 


나는 ‘일반적’이라고 굳이 강조하는데 이는 ‘목사’와 ‘장로’의 직분적 구분이 과연 온당한가에 대한 물음이 있기 때문이다. 


5.2. 목사·장로·감독

장로교에서는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근거하여 장로직을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로 구분하고 이를 목사와 장로로 환원하여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장로직의 이런 구분이 한 구절의 해석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구약을 살펴보면 ‘장로’라는 말 안에 이미 ‘교육자’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구약에서는 가정의 대표자이면서도 유월절에 대해 ‘가르치는’ 책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신약에서도 특정한 자격을 갖춘 자들을 장로로 세웠는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장로에 대하여는 ‘감독’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였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는 양 떼에 대한 목회적인 책임을 당부하기도 했다. 또한 장로들은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고, 그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 반박할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도 장로로 불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가 되도록 그리고 감독자로 섬기도록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목사와 장로를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의 구분으로서가 아니라 

장로라는 직분 안에 있는 책임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옳으며, 

이를 감독이라는 말로도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성경은 한 교회 안에 복수의 장로를 세우고 그들의 책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장로라는 단어만을 사용하면서 교회의 가르침과 목회적 책임을 말하는 신약성경의 구절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장로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며, 야고보는 병든 자를 위한 기도에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구절 안에서 당시 목사의 직을 맡은 사람이 배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이 정하는 바에 따르는 장로를 선출하되 선출되는 모든 장로는 가르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또한 신앙과 경건한 삶을 통해 교회를 바르게 세워 갈 책임도 다해야 한다. 


특별히 ‘장로교’의 정치는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가 함께 협력하되 모든 성도는 공동의회(교인총회)를 통해 교회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다. 우리가 이런 장로회의 구성 가운데에서 등장하는 리더십을 일컬어 ‘복수 리더십’이라 부른다.  

 

5.3. 복수 리더십

장로교회는 치리회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구조를 가진다. 

이는 민주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제도로 보이기도 하며,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로들’로 구성된 ‘복수 리더’는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며, 독재적 권력화를 막는 중요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공동의 신앙고백과 바른 성경적 세계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는 공감과 소통으로 세워지는 장로들이 가진 복수 리더십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긴급히 요청되는 제도적 과제다. 


과거 한국교회가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가 부패의 온상이 되고, 함께 이익을 취하는 조직으로 변질한 것으로 인해, 오늘날 얼마나 뼈아픈 결과를 낳았는지 상기해야 한다. 당회가 함께 타락하여  교회를 사유화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에 동조한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 깨닫고 이제라도 복수 리더십을 바르게 세워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어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동력을 일으켜야 한다. 


한 사람의 독단적 행태와 탐욕적 지향을 막아내는 제도적 보완으로서 올바른 복수 리더십이 존중되고 발휘된다면 현재 한국교회에 만연한 목사중심주의와 목사의 독단적 횡포를 막아내는 중요한 기점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이런 정치 원리가 개교회 특히 장로교로 분류하는 교회에서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6. 항존직에 대하여

끝으로 ‘항존직’이라는 것에 대하여 간단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목사’·‘장로’·‘집사’가 항존직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여기에서 항존직이라는 표현은 한 개인에게 부여된 것이 ‘항존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직분이 항존적이라는 의미다. 

개인은 해당 직분이 교회를 통해 부여되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한다. 


이로써 그 직분이 달라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항존직’을 ‘종신직’으로 오해하는 듯하다. 

어떤 개인이 ‘목사’나 ‘장로’가 되면 죽기까지 자신을 목사 혹은 장로여야 하는 것처럼 행세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평생 ‘집사’로 섬기고자 하는 이는 왜 없을까? 어쩌면 우리의 감춰진 의식에서 집사직분을 하등이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목사든 장로든 임기 없는 종신직처럼 환원하여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이다.  


또한 항존직이라 할 때 그 직분의 존재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로서 그 책임이 있다. 항존직을 가진 이가 교회를 세우는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를 무너뜨린다면 그의 직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 수단이 되어버린 직분제도는 근절되어야 한다. 


7. 마치면서

교회는 모두 가르치는 교회이며, 모두 듣는 교회다 [6]. 

교회 구성원 모두는 공동체 내에서 들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배울 때가 있고, 증언할 때가 있다. 가르치는 일과 듣는 일은 교회 안에 구성원을 시혜자와 수혜자를 나누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교회 안의 두 가지 기능이다. 


교회는 상호 가르치고, 상호 돌봄을 받는다. 

특히 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세움을 입은 당회는 더욱 그리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귀를 기울이며, 시대의 징조에 함께 마음을 기울이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향한 상호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모두가 듣는 자이며, 모두가 가르치는 자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성령하나님의 은사는 이 두 가지 기능이 공존하는 동시성에 기초하여 이해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주인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 주인이요 스승이 되신다.  


복수 리더십에 대하여 상고하면서 나는 누가 가르치는 자이며, 누가 배우는 자인가에 대한 의심과 회의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일을 포기한 것인지 모르고 어떤 이는 듣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한 듯하다. 


하지만 그 포기와 완강함이 한국교회를 더 병들게 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1]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하’,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권수경&이상원 역, 809

[2] 레오나르도 보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 일월서각, 1986, 김쾌상 역, 79

[3] 고든 루이스&부르스 데머리스트, ‘통합신학 3’, 부흥과 개혁사, 2011, 김귀탁 역, 602

[4] JohnMurray, “Government in the Church of Christ,”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Murray(Edinburgh:Banner of Truth, 1976),1:265.

[5] 히브리서 4:6

[6] 레오나르도 보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 일월서각, 1986, 김쾌상 역,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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