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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Aug 24. 2024

여름을 떠난 햇살은 마당을 기웃거리고



 마당에 초록 밤송이 하나 떨어졌다. 가시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얼기설기 한걸 보니 밤이 제법 여물었겠다. 털신을 신은 발로 밤송이를 툭툭 건드려 배꼽을 찾았다. 발뒤꿈치에 힘을 주어 배꼽 부분을 밀어내니 툭 갈라졌다. 밤송이 안에는 아직 여물지 않은 풋밤이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허리를 구부리고 양발로 밤송이를 벌려 풋밤을 뺐다. 앗 따가! 밤송이는 여름 내내 잉태하고 있던 자신의 새끼를 지키려는 듯 저항했다.

 풋밤 한 알을 입으로 가져가 겉껍질을 깠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떫은맛이 나를 유년 시절로 데리고 갔다.


  내 생일은 추석날 이틀 전이다. 할머니와 엄마는 추석 음식을 준비하느라 내 생일은 안중에도 없다. 엄마는 안마당에서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절구봉을 들어 연신 절구통에 내리찍었다. 할머니는 절구통에서 하얀 쌀가루를 퍼서 채에 담아 흔들고 있었다.

 아무도 내 생일을 챙기지 않는 것이 서운해진 나는 대뜸 할머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 얼굴을 할머니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할머니 오늘 내 생일인데, "라고 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내일모레가 추석이니 그때 맛있는 거 많이 먹으라고 했다.

엄마는 절구질을 계속하며 “계집애가 생일은 무슨 생일이야! 좋아하는 밤송편 만들어 줄 테니 뒷골 가서 밤이나 주어와!”라고 했다.


마을 뒷산에는 작은 실개천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뒷골이라 불렀다. 그 숲에는 밤나무가 제법 많았다. 나는 바구니를 들고 길섶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을 툭툭 걷어차며 뒷골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소슬바람이 불었다. 초롱꽃을 닮은 잔대꽃이 조롱조롱 피었고 노란색 마타리꽃이 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밤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밤송이는 입을 벌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앙다물고 있다. 하늘을 닿을 듯 높게 자란 나무만 이리저리 올려보던 나는 밤나무 위로 올라갔다. 밤이 여물었을 듯 보이는 밤송이만 따서 아래로 던졌다. “앗! 따가!” 날카로운 밤송이가 손가락을 찔렀다.

떨어진 밤송이를 한 곳으로 모아 놓고 나뭇가지를 주워 밤송이의 배꼽을 후볐다. 겉껍질은 저항 한번 못하고 아가리를 쩍쩍 벌렸다. 덜 여문 풋밤 삼 형제가 나란히 들앉아 있다.

밤을 바구니에 담아 바위를 찾아 걸터앉았다. 이빨로 겉껍질을 까고 엄지손톱으로 속껍질을 밀어내 입안에 넣으니 남아있는 껍질이 떫게 덤벼들었다. 덜 여문 밤이 입안에서 ‘오독오독’ 비명을 질렀다. 풋밤의 달큼함과 알밤의 고소한 맛이 함께 돌아다니며 떫은맛을 잡았다.

바구니에 가득했던 밤은 사라지고 산그림자는 길게 누웠다. 서쪽 능선을 넘고 있는 노을이 섧도록 붉었다.


 채송화는 더운 여름을 견디느라 지쳤는지 가늘어진 허리를 깊게 수그렸다. 봉숭아 씨방은 오후의 햇살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하품을 하고 있다. 텃밭에 부추꽃이 하얗게 피었다. 마당에 선 배롱나무는 꽃을 다 떨구지 못했는데 숲 속 단풍나무에 물이 들었다.

툭! 밤송이가 떨어졌다. 여름을 떠난 햇살은 마당을 기웃거리고 소슬바람은 가을의 향기를 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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