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기억, 다가가지 못하는 손

생활지원사의 일기

by 작은거인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창밖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옴마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 예보는 있었지만 내릴 기색조차 없던 밤이었다.

아침의 세상은 어느새 하얗게 변해 있었다. 출근길이 걱정되어 서둘러 길을 나섰다. 사부작사부작, 눈 밟는 소리를 길동무 삼아 조심조심 타인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첫 번째로 방문할 어르신은 전화기가 고장 나 연락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방문 날짜가 아니어도 오며 가며 들러 안부를 챙기곤 한다. 집 앞에 도착하니 눈이 깨끗이 쓸려 있다. 나를 보더니 어르신이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신다.
​"요양사 미끄러질까 봐 내가 눈 씰었어. 밤새 눈이 말도 못 하게 왔어. 담벼락에 수북이 쌓였어."
​하지만 눈은 그늘에만 흔적이 남았을 뿐, 양지바른 곳은 이미 다 녹은 상태였다. 어르신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나 보다.
"어서 오세요." 하며 손을 모아 허리를 숙이는 어르신을 따라, 나도 합장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환기되지 않은 방 안의 퀴퀴한 냄새가 와다다닥 달려들었다. 노인의 체취와 낡은 이불의 먼지가 뒤섞인 냄새에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멈춘다. 나는 온기라고는 전기장판이 전부인 침대에 앉아 가방에서 무차가 담긴 보온병을 꺼냈다. 컵에 따뜻한 차를 가득 따르고, 이전에 가져다 드린 보온병에도 남은 차를 채웠다.
​그 사이 어르신은 비닐봉지가 씌워진 플라스틱 그릇 하나를 내미셨다.
​"요양사 오면 주려고 어제 미리 깎아 놨어. 매일마다 맛있는 차를 얻어먹는데 내가 공을 할 게 이기밖에 없다. 딸이 사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여."
​경증 치매인 어르신은 기억을 놓았다 주었다 하면서도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비닐봉지 안에는 이미 산화되어 짙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사과 몇 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깎았다기보다 차라리 던져서 깨뜨린 듯 껍질이 덕지덕지 붙은 파편이었다. 갈변하여 끈적해진 사과에는 방 안의 퀴퀴한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듯했다.
​갈퀴처럼 마디마디 굽은 손을 달달 떨며 내게 사과를 내민다. 먹어 보라고 재촉하는 그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작은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어르신은 이내 더 큰 조각을 내 손에 쥐여준다.
냉큼 받지 못한 사과는 입안에서 아 그 작거리기만 할 뿐 쉬이 삼켜지지 않았다.
지워져 가는 기억으로 내민 ​퀴퀴한 비위생 한 조각을 억지로 씹어 보지만, 끝내 단맛을 찾지 못한 채 명치끝에 돌덩이처럼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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