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공포다. 무에서 출현하여, 이름을 얻게 되고,
자의식과 깊은 내면의 감정을 가지게 되고,
삶과 자기표현에 대해 괴로울 정도의 내적 열망을
가지게 되는 존재—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 어네스트 베커
1990년 2월 14일 우주탐사선 보이저(Voyager) 1호가 지구에서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칼 세이건(Carl Sagan)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으로 묘사했다. 나중에 자신의 책 이름으로도 썼다. 물 흐르듯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지만, 세이건의 제안을 받아들인 미항공우주국(NASA)은 보이저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안에서의 지구는 우주 먼 곳에서 한 점으로 보이게 된다. <코스모스>란 책과 영상물로 워낙 유명한, ‘코스모스=세이건’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인 이 셀럽 천문학자는 살아있는 동안 한결 같이 우주 내 인간의 왜소함과 변방적 위치를 깨닫고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좀 길지만, 그 자체로 교훈적인 글이라 논의에 앞서 번역하여 인용한다.
이 거리에서 보면 지구는 어떤 특별한 관심도 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구는 다르다. 다시 한번 점을 보라. 그것은 이곳에 있으며, 우리의 집이며, 우리 자신들이기도 하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 당신이 들어보았던 모든 사람,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이 지구 위에서 살았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와 경제이론들, 모든 영웅과 겁쟁이들, 모든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들, 모든 왕과 농부들,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 연인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들, 희망에 찬 아이, 발명가와 탐험가들, 모든 도덕군자들, 모든 부패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들, 모든 최고 지도자들,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이곳에 살았다—태양빛에 매달려 있는 한 줌의 먼지 위에서.
지구는 우주라는 거대한 원형경기장의 아주 작은 무대이다. 그 모든 장군들과 황제들에 의해 뿌려진 피의 강을 생각해 보라. 영광과 승리 속에서 그들은 일시적으로 지구라는 점의 작은 한 조각을 차지하는 주인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 한 귀퉁이의 거주자들이 다른 귀퉁이의 서로 다를 바 없는 거주자들에 대해 저지른 끝없는 잔인함을 생각해 보라—그들이 얼마나 자주 잘못 알고 있는지,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지,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렬한지. 우리의 가식적인 태도, 상상으로 만들어낸 우리의 자존감, 우주에서 우리가 특권적 지위를 가진다는 망상, 이 모든 것들은 이 한 점의 창백한 빛으로 무색해진다. 우리 행성은 거대하고 감싸고 있는 우주의 암흑 속 외로운 점 같은 존재다. 이 거대함 속 어둠에 갇힌 우리를 깨우치고 구하기 위해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거라는 조짐은 전혀 없다.
(… 중략…)
사람들은 천문학이 겸허한 인격 형성을 위한 경험을 제공해 준다고 말한다. 인간 자만심의 어리석음을 티끌 같은 우리 세계를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사진 이미지보다 더 잘 증명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나에게는 이것이 우리가 서로를 더 친절하게 대하고, 이 창백한 푸른 점—우리가 아는 유일한 우리의 집—을 잘 보존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1]
세이건에 토를 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이건의 스케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우리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외(敬畏)를 체험하고, 큰 산에 올라 굽이 굽이 펼쳐진 다른 산들을 보고, 또 그 산들의 끝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광대함과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신기하게도 착한 마음도 일으키고, 전혀 특별하지 않은 내 존재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이어지는 겸허한 마음의 태도 같은 것도 가지게 한다. ‘창백한 푸른 점’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이건이 말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중요하고,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조금은 더 나은 모습을 가지게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일러두기]에서 사전고지 했지만, 이 책은 어네스트 베커의 생각을 일정 부분 추종한다. 세이건의 글은 깊은 울림을 주지만, 인간존재의 많은 문제들이 여전한 것은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면서도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아서가 아니다. 세이건이 혐오하는 ‘피의 강’과 ‘격렬한 증오심’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상징적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 때문에 생긴다. 세이건이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이 모두는 모습만 다른 상징적 불멸 프로젝트이다. ‘상상으로 빚은 자존감’, ‘우주 내의 특별한 위치’ 같은 것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은 창백한 푸른 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베커를 따르자면, 그런 것들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그래서 인간은 괴로운 존재다.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는 없다. 베커의 심리역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존재다. 우주를 바라보며 착한 심성의 세이건 박사는 인간이 우주 내에서의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기 바랐지만, 베커에게 인간은 근원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아무리 왜소한 가치로 덮어서 가리려고 해도 우리의 심장 고동 아래에는 여전히 우주적 특별함(cosmic specialness)의 고통이 드리워져 있다.[2]
프로이트는 삶의 본능은 일상의 삶 속에서, 죽음의 본능은 꿈속에서 각각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 이 삶의 욕망을 초월한 ‘욕망의 죽음(death of desire)’을 원하기도 한다는 것을 간파한 듯도 하다. 죽음 본능은 욕망의 덩어리인 생명 자체가 없는 존재태(存在態)에 대한 욕망이자 소망이다. 프로이트가 만든 용어는 아니지만 ‘열반원리(Nirvana Principle)’라는, 우리에겐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죽음은 우리 삶의 비극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마지막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커를 따르자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죽음은 공포이고 그래서 그 공포를 없애려고 인간은 못하는 짓이 없지만, 죽음을 극복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의 가능성은 없다. 이것이 베커가 드러내는, 절망적인 진실이다. 베커의 생각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본다.
인간은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존재다. 독일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Yaspers)는 인간이 그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한계 상황’이라 불렀다. 젊은 시절 독서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지만, 그 기억에서 죽음도 한계 상황에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는 꺼낼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것에 얽매여 있을 수만은 없지만,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이 사태는 가끔 꾸는 악몽처럼 우리를 괴롭혀 왔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어제도 그랬지만 죽음에 대해 글을 쓰는 오늘도 지구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노화, 사고, 질병으로 사망한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죽음은 눈앞의 문제이지만 죽지 않기를 원한다면 해결 방법은 없어 보인다. 죽음은 우주적 맥락을 고려하기에는 어쩌면 너무 다급한 문제이다. 왜 우리는 예정된 죽음을 인식하고 또 그것을 두려워하지만 어떤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우주의 종말 따위와 연관해 사색하는 것은, 무해하지만 한가로운 놀음이다.
죽음은 심각한 문제이고, 심각한 문제에는 많은 글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많은 문헌 중 단 하나,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글과 육성을 통해 확인하게 된 죽음학의 고전, 이미 여러 번 인용했던 <죽음의 부정>은, 옛날식 표현을 쓰자면, 오거서(五車書)를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한 권의 책이 ‘다섯 수레의 책’을 압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1973년 출간된 어네스트 베커의 이 책은 이듬해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었지만, 자신은 지금 기준으로는 젊은 나이인 50세에 암으로 사망했다. 상이 주어진 것은 그의 사망한 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어네스트 베커는, 지성계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지만,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으로 홀연히 등장한 학자이자 저술가다(그전에 관련 저작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학자라고 했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와 넓이를 감안하면 정신분석학자, 문화인류학자, 철학자 또는 이 모두를 합친 지성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본다.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석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베커와 그의 책 속에서 인용된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아이는 4-5세 정도에 죽음을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개인적 편차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실인 것 같다. 아래의 예와 비슷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었던 것이라 짐작한다.
2018년 1월 8일 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87세가 된 고(故) 이어령 선생은 여섯 살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말한다—“나는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고 있었다. 화사한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대낮의 정적, 그 속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풍요하고,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었다. 슬퍼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먹먹하게 닥쳐온 그 대낮의 슬픔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내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다.” 80년도 넘게 지났지만, 노교수는 죽음의 인식과 그것이 주는 슬픔을 어제의 일인 듯 기억해내고 있었다.
12살의 한 소년은 꿈을 통해 처음으로 죽음을 극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사신(死神)이란 말을 알 수 있는 나이도 아닌데, 소년은 꿈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그에게 쫓기고 있었다. 잡힌 아이들은 일렬횡대로 서있었고, 사신이 손을 스윽 한번 스치면 쓰러져 죽었다. 소년은 담 뒤에서 두려움에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살아남은 친구들과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도망을 치다 꿈에서 깬다. 나의 기억이다. 어젯밤의 꿈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기억은 손상되지 않고 컴퓨터 하드디스크 수명보다 훨씬 긴 50년을 넘겨 견디고 있다.
아래에 소개되는 ‘공포관리이론’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심리학자는 어릴 때 ‘피를 뚝뚝 흘리는 자주색 괴물’에 쫓기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3] 죽음을 인식하게 되는 경험은 결코 유별나거나 드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험들은 다른 듯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음의 공포를 인식하는 것은, 설사 간헐적으로 일어난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괴롭고 무서운 정신적 경험이다. 또다시 개인적 경험이지만 중학교 시절 다시 죽음의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등교 후 수업을 전폐하고 며칠 동안 학교 건물 옥상에 드러누워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수업을 빼먹고 어떤 벌을 받았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벌 받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제 일을 기억하는데도 애를 먹는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이어령 선생의 기억처럼. 경험의 내용이 다를 수는 있으나, 사람들과 섞여 살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정도로만 기억하는, 죽음의 문제와는 무관할 것 같아 보이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s)도 죽음을 두려워했다—죽음의 공포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내 어머니는 쌍둥이를 낳았다. 나 자신 그리고 두려움을.[4]
6,000년 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불멸의 영약을 잃어버리고 거지 행색으로 초원을 떠도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 왕은 통곡한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다.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속을 파고드는구나!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 대초원을 헤매고 있고…[5]
우리는 점토판의 문자로 전해진 이 최초의 비극시를 지금도 공감하면서 읽지만, 베커는 죽음의 문제를 이보다 훨씬 더 깊이 파고들었다. 베커의 죽음학이 일견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의 문제를 ‘영웅주의(heroism)’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는데 있다. 우리는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종교분쟁은 끊이질 않는 것일까?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왜 인간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가? 전쟁을 하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왜 서로를 적대시하는가? 생각이 많기로 따를 자가 없을 프로이트에게도 이것은 혼란스러웠던 것일까?
인간집단이 왜 평화 시에도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지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수백만 명은 아닐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품게 되면, 개인이 그동안 이룩한 도덕적 획득물은 모조리 소멸되고,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조잡한 정신적 태도만 남을 것 같다.[6]
종교와 종교, 인종과 인종,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이 둘 사이의 적대와 그 결과로 일어난 폭력이나 전쟁은 역사학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국가 사이에서든 국가 안에서든—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갈등과 억압이 일으키는 폭력과 살상의 지옥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저런 갈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리에서 마주한 두 정치 진영의 시위대가 서로에게 퍼붓는 욕과 손가락질, 그리고 가벼운 폭력행위는 차라리 평화스럽게 보일 정도다.[7] 어떤 물리적 폭력도 없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종교적 포용성을 지닌 곳에 살고 있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다행스럽게 여긴다. 이렇게 비교적 안전한 나라에 살고 있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일들을 하나도 겪지 않았으면서 언론기사와 보도영상으로만 전달받은 정보에 의존해 또다시 글로 언급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질문은 하게 된다—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선악의 대결인가? 왜 우리는 결국 사기꾼으로 드러나는 거짓 예언자들과 긴 수염의 구루(Guru)들을 재산까지 바쳐가며 따라다닐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광적으로 자기 나라의 ‘스트롱맨’들을 추종하는 것일까? 왜 이들의 명령을 따라 그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어야 하는가? 왜 이 종교는 되고 저 종교는 안되는가? 이미 미주에 밝혔듯이, 이 책은 어떤 종교적, 사회정치학적 입장도 옹위(擁衛)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과 인간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근원에 ‘죽음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어네스트 베커의 생각을 받아들여 이해라도 해보려는 것이다. 쉽게 받아들이기 쉬운 논리는 아니지만, 베커를 따르자면,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 종교 분쟁, 사회 갈등은 선악의 문제나 종교 교리의 우위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다. 어떤 주장도 완벽하게 옳을 수는 없을 텐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류의 진영 간 또는 종교 간의 격렬한 대치는 그들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념이 무엇이길래? 신념의 관철,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획득되는 ‘영웅성(heroics)’은 나의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 진영을 무시하거나 사회악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피를 토하는 듯한 정치 선동가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언어와 그 앞 대중의 눈물을 저열하고 무지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우리 서로에게 있는가? 비난할 수 있는 근거라고는 신념의 내용물이 조금 다르다는 것뿐인데도 이렇게까지 폭력적이 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베커의 생각을 빌려 최소한의 설명은 할 수 있지 싶다. 물론 설명이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고귀한 존엄을 가지고 자연을 떨치고 나왔다는 점에서 자신의 눈부신 유일성을 인식하는 존재이지만, 그는 또 1 미터 남짓한 아래의 땅 속으로 돌아가 썩어 영원히 사라지는 존재이기도 하다.[8]
영웅주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그 밑바닥을 발가벗기는 것, 즉 인간의 영웅적 행위의 본래적 성격과 추동 요인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힘에 대한 발견, 즉 죽음의 공포가 그것이다.[9]
프로이트의 글에서도 이런 통찰이 발견된다.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으며,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반응하는 본능적 내용물은 우리 내면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영웅주의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영웅주의의 합리성은 개인의 삶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신적 이상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10]
죽음을 떼어 놓고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베커의 심리학이자 철학이다. 인간은 처절하게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불멸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물리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이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상징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불멸 프로젝트는 많은 경우 ‘상징적 영생(symbolic eternity)’을 도모한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그들의 영웅적 행위가 영원히 남을 역사 속에서 불멸성을 찾는다. 영화 <트로이(Troy)>의 전투 장면에서 아킬레스의 화신(化身)인 배우 브래드 피트에게 누군가가 묻는다—왜 전쟁에 참가하느냐고. 그는 바삐 적을 죽이러 가면서 말한다—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지. 아킬레스의 불멸 프로젝트는 ‘역사책에 이름 새기기’이다. ‘역사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이다’라는 대사를 사극에서 지겹게 듣게 되는 것은 이런 불멸주의적 사고가 인간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알고 두려워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요술 방망이 같은 추상적 사고로 ‘역사적 불멸’이란 상징을 빚어내어 죽음을 이겨내었던 것이다.
종교는, 이를테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영혼의 지속성을 가르치고 육체의 부활을 통한 비물리적 영생을 약속한다. 어떤 면에선 역사적 불멸보다 더 솔직 담백하다. 먼저 종교는 어떤 불멸 프로젝트보다도 더 강력하다. 일단 세계 인구 대비 신자의 수가 압도적이다—2024년 현재 전 세계의 종교 신자 수는 세계 인구의 84.4%에 해당하는 약 58억 명에 이른다.[11] 통계 수치로만 보자면, 현재 지구상의 인간 대부분은 ‘종교적 불멸주의자’들이다—아마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 책은 종교적 불멸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무신론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통계 자료는 종교의 압도적 지배력을 보여준다—통계는 진실의 학문이 아니라 사실의 학문이다. 종교적 불멸 프로젝트가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그 믿음이 흔들림 없는 것이라면 세계인구 80% 이상의 불멸 프로젝트는 이미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음 후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해도 이걸 사전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므로 신앙인의 믿음을 바꾸는 요인이 될 수 없다—종교적 불멸 프로젝트에는 실패판정을 내릴 수 없다.
불멸 프로젝트로서의 종교의 이 압도적 영향력은 죽음의 공포가 그만큼 심대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라도 없으면 인간은 견뎌낼 수 없다—종교는 나쁜 것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나의 ‘종교적 영생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어쩌면 그 자체가 지옥 같은 심리적 상태이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 시대 교황권력과 황제권력의 충돌이 부른 ‘카놋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사책은 알려주지만, 그 역사책은 역사 상 가장 추악한 전쟁 중 하나였음도 기록으로 남겼다. 십자군 전쟁은 결국 교황청에서 수주한 ‘불멸 프로젝트의 위탁 용역’ 같은 것이다. 불멸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그 끔찍한 전쟁, 그리고 기사들의 영웅적 용맹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실제 현장을 경험할 수 없는 우리는 영화 속에서만 악마화된 자살 폭탄 테러범(suicide bomber)의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외침을 듣지만, 이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보존되고, 성전(聖戰)을 치른 자신이 행동이 천국에서의 영생으로 이어진다는 불멸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세계대전을 포함한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전쟁들을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선명한 선악의 대결이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럼에도 대결의 결과는 참혹하다. 전쟁을 포함한 인간의 많은 행위는 상징적 불멸을 위한 것이다. 민족, 국가 정체성, 정치 지향성은 나보다 오래 살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고, 또 지속되어야만 한다—그것을 통해 나는 불멸한다. 이렇게 쓰면 믿기 힘들지만, 역사 속에서도, 현재 전 세계에서 목격되는 여러 사회정치적 상황을 통해서도 이것은 확인된다. 전쟁을 국가나 사회의 경제적 이익과 결부시켜 말하기도 하지만, 국가든 개인이든 넉넉한 은행잔고가 나의 ‘불멸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같은 이야기다. 베커도 자신의 저서들 여러 곳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부조리한 현상들의 기저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성요소, 즉 죽음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베커의 생각이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래서 이런 참혹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베커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하고 설명하는 것은 그의 책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자책하게 된다. 무책임하지만, 부디 원전을 읽어보시라 권할 수밖에 없다—어떤 책들은 이 방법 외에는 없고, 베커의 책이 그렇다.
베커의 글은 어려우면서도 아름답지만, 결코 가슴에 박히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죽음을 직시하고 자기표현과 초월을 추구하자는 제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것을 깊이 논의할 역량도 없고(이 책은 철학서가 아니다), 베커의 제안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그래도 베커의 책을 통해 죽음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지적 소득이지만, 베커의 책을 읽어도 괴로움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베커의 생각과 주장은 상당 부분 정신분석학적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과학적 논증이 아니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므로 베커의 철학과 심리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해도 탓할 일은 못된다. 그러나 프로이트와는 달리 베커의 사상에 대해서는 검증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시키려는,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한 학문적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1980년대 초 <죽음의 부정>은 박사과정에 있던 사회심리학 전공 대학원생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그들은 회상한다—“베커의 저서들은 마치 로제타석(Rosetta Stone)과 같은 계시였다.”[12] 죽음을 깊이 사색한 한 인문학자의 저서에 영향을 받은 이 젊은 심리학자들은 30여 년에 걸쳐 하나의 심리이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다. 바로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 이하 TMT)’이다. 이것은 유사 사례가 드문, 좀 독특한 학문발전 현상이다. 이들은 베커의 생각을 기반으로 실증 가능성을 염두에 둔 다양한 심리실험을 수행한다. 베커를 발견했던 박사과정 학생들 그리고 이어서 TMT의 대표적인 학자가 된 3인은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 쉘든 솔로몬(Sheldon Solonmon), 톰 피츠친스키(Tom Pyszczynski)이다. 죽음의 공포가 관리된다는 이론이지만, 죽음이 가면을 쓰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이론이기도 하다.
TMT와 관련된 논문은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위 3인을 포함하는 대표적 논문들과 저술을 중심으로 대강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13] TMT는 자기 보존 본능과 죽음의 불가피성(그리고 비예측성)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다룬다. 이러한 갈등은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공포는 인간의 삶에 영구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상징 시스템들(symbolic systems)’을 수용함으로써 관리된다는 이론이다. 불멸을 보장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신념체계는 사후의 삶이나 비의적(祕儀的) 영생에 대한 믿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문화적 가치체계 역시 상징적 불멸(symbolic immortality)을 보장한다. 언급했듯이 종교, 이데올로기, 민족 정체성, 혈통, 불멸의 역작, 배금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닌 불멸 프로젝트이며, 위의 세 학자들은 이를 ‘문화적 세계관(Cultural World-View)’으로 개념화한다. 이런 것들로 획득한 상징적 정체성(symbolic identity)은 개인보다 위대하고 개인보다 오래 지속된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다. 베커는 이 모든 것을 영웅주의라는 틀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당신이 오래 남을 또는 남아있기를 바라는 예술품을 창조하는 아티스트라면 당신은 예술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불멸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즉, ‘예술적 영웅’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성전에 참여하고 있다면 당신은 종교가 발주한 불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당신은 ‘종교적 영웅’이 된다. 불멸 프로젝트는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종교 분쟁이나 전쟁은 언어의 접근이 불가능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불멸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내놓는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있을까?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멸 프로젝트는 포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TMT 실험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단어나 생각에 노출된—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피험자들은 부정적 태도나 공격적 행동을 보인다. TMT 초기연구의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14] 매춘부의 보석금을 결정하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판사가 있다. 늘 있는 이 일은 판사에게는 사소한 일이었으며, 이런 경우 보석금은 보통 50달러 정도였다. 이날 판결에 앞서 판사는 연구자들이 준비한 설문에 응하게 된다. 설문지는 일종의 성격평가(personality assessment)를 위한 것이라고 피험자에게 설명된다. 설문지에는 이런 질문들이 포함된다—“육체적으로 죽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서술해 보시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 기술하시오”, 등등. 이 질문들은 통제 피험자들(control subjects)에게는 제시되지 않는다. 죽음과 관련된 질문을 통해 죽음을 상기시키는 방식을 TMT에서는 ‘죽음 현저성(mortality salience)’ 조작이라고 부른다. 죽음 현저성이 담긴 설문지에 답한 판사들은 이전의 평균 50달러 대신 평균 455달러의 보석금을 부과했다. 해석은 이렇다—자신의 죽음 또는 죽음 자체에 대한 생각은 판사로 하여금 자신과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도덕률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게 한다는 것,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멸의 문화적 세계관을 해치는 행동에 대해 더 가혹했다는 것이다.
TMT는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후 아들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폭등한 사실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 파괴의 자리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확성기를 들고 미국의 가치를 지키고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겠다며 메가폰을 든 부시 대통령의 절규는 초라했던 지지율을 극적으로 끌어올린 것이다.[15] 베커는 또 다른 명저 <악(惡)으로부터 탈출(Escape from Evil)>에서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를 인용하며 전쟁의 본질을 설명한다. 넓게는 불멸 프로젝트가 야기하는 ‘사회악(Social Evil)’의 본질이다. 사망하기 직전 베커를 인터뷰했던 철학자 샘 킨(Sam Keen)은 <죽음의 부정> 서문에서 말한다—“베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악의 학문을 창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16] 베커는 바르샤바, 히로시마,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의 지명으로 환유되는 비극적 역사의 사건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국가라는 지배구조와 그것에 의한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내적 마찰로 일어나는 갈등도 전달한다. 전쟁은 이 갈등을 해소하는 사회학적 ‘안전 가치(safety value)’가 된다.
종종 전쟁의 발발에 의해 동반되는 환희에 찬 해방감… 전쟁은 지배계급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이국(異國)의 적을 사지절단하여 죽이는, 내 마음에 기꺼운 사건(happy occasion)으로 방향을 우회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17]
TMT의 몇 가지 실증 사례를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을 상기시키면, 즉 죽음 현저성에 노출되면, 피험자들은 유명인사가 되고 싶다는 등의 명성에 대한 욕망을 더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피험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은하의 별’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데, 이것은 ‘죽음을 초월한 상징의 지속성(symbolic continuance beyond death)’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18] 베커의 책에서 비판적으로 깊게 논의되는 프로이트에게도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의 완성과 그에 따른 학계의 명성이 그의 상징적 불멸을 이루어줄 불멸 프로젝트이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이 공격받았을 때 뜬금없이 기절한 사건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의 완성으로 추구했던 영웅성이 좌절된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베커는 프로이트의 성격분석을 통해 보고하고 있다.[19]
죽음 현저성은 럭셔리 제품이나 지위 상징(status symbol)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증대시킨다. 물질적 소유는 자존감(self-esteem)을 증폭시키고, 이 자존감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불안 완충재(Anxiety Buffer)’ 역할을 수행한다.[20]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창조성(creativity)을 고양시키려는 욕구와 유산(legacy)을 통해 오래 지속되는 표식을 세상에 남기려는 욕망이 증가한다.[21] 베커가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여러 번 인용하는 오토 랑크의 책 <예술과 예술가(Art and Artist)>는 이미 이러한 통찰을 담고 있다.[22]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 역시 사람들이 ‘죽음 불안(death anxiety)’을 어떻게 관리하는 지를 보여 준다. 온라인 페르소나(online persona)를 만들고, 소셜 미디어 노출을 계속 유지하려는 노력, 즉 ‘디지털 영생’의 추구가 그것이다.[23]
TMT는 30년 넘게 방대한 경험적 증거자료를 축적하면서 베커의 사생관을 강화시켜오고 있다. 죽음에 대한 베커의 해석은 옳았고 TMT 연구자들은 베커의 생각을 확인해 주지만, 베커 이상의 해결책을 주는 것은 아니다. 베커처럼 TMT의 선구자들 역시 성숙한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이자는 나름의 제안을 한다. 그들이 오랜 시간의 연구결과를 정리한 책 마지막 부분의 제안은 이해도 되고 진지하기도 했지만 한편 너무 많이 들어 지겨워진 노래 같기도 하다—필멸의 존재성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심에 함몰되지 않는 사고를 가진다면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더 나은 세계를 구축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였다. 죽음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가지자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불멸은 불가능하므로 이렇게라도 해보자, 그런 말이기도 할 것이다. 공자님 같은 말씀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 인간 전체 그리고 세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베커를 [1부]의 마지막에 둔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이 [2부]에서 다룰게 될, 이른바 ‘과학기술에 의한 불멸 프로젝트’와 내용적 연결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베커를 따른다면, 우리 인간의 많은 생각과 행동은 죽음을 부정하기 위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불멸 프로젝트’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불멸이다. 베커는 자신의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브라운, 마르쿠제, 해링턴의 논지에 철퇴를 가하는 <영웅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장에서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말을 내뱉는다.
진정한 불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단지 인간의 성격방어와 미신의 강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24]
몸의 해방을 통한 죽음의 극복(브라운), 사회적 혁명뿐 아니라 심리적 비억압에 저항하는 혁명을 통한 죽음의 정복, 또는 흔쾌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마르쿠제), 과학에 의한 죽음의 파괴(해링턴)라는 이 모든 해결책들이 베커가 보기엔 심리역학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어지는 <정신치료의 한계>를 다루는 소단원에서 자신의 책에서 길게 논의했던 바를 선언적으로 요약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소멸성을 인식하는 인간존재의 진정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25]
베커의 글은 어떤 인문학적 장식도 없는 죽음의 참모습을 보여주지만, 너무 절망적인 톤으로 점철되어 있어 심리적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베커가 영웅주의를 통해 밝히는 불멸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신경증적 방어기제(neurotic defense mechanism)’이며,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그릇된 전제들(false premises)’에 기반한 불멸 프로젝트이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내용과 결과물이 너무나 처참하고 비극적이다. 엄청난 물리적 폭력을 야기하기도 하는 이 불멸 프로젝트의 산출물은 비극적이게도 물리적 영생이 아니라 상징적 영생이다. 상징적 영생은 물리적 영생의 불가능성이다. 물리적 영생이 가능해진다면 베커가 말하는 불멸 프로젝트의 모든 비극성이 사라질까? 베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베커는 과학에 의한 불멸을 주장하는—당시로서는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해링턴을 여러 번 언급하지만, 결코 우호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베커는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그가 흠모하는 키에르케고르 식의 ‘초월’을 이야기한다. 키에르케고르 식의 종교적 초월은 아니지만, ‘창조적 자기표현(creative self-expression)’을 추구하고, 예술, 문학, 과학 등에 대한 ‘문화적 헌신(cultural constribution)’를 통해 물리적 삶의 기간을 넘어 지속되는 가치를 창조하고, 죽음의 공포를 대면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진정한 영웅주의(authentic heroism)’를 이야기한다. 이렇게 요약해 보지만,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베커의 이야기는 철학자가 아닌 내가 논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한다—진심이다. 무능력을 인정하고, 살짝 건너뛰어 베커의 정의에 따른 ‘진정한 불멸’, 즉 정말로 죽지 않는—심리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인간을 이야기하는 21세기의 ‘불멸 서사’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한다. 우리는 상징적 영생에 지쳤다. 21세기의 불멸 프로젝트는 더 이상 상징적 영생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비극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도 될까? 이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생의 과학(Science of Eternity)’이란 이름으로 불멸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으며, 성공을 예언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매사 그렇듯, 그것이 우리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다.
[1] Carl Sagan, Pale Blue Dot: A Vision of the Human Future in Space, Random House, 1994, p. 6~7. (창백한 푸른 점, 현정준 역, 사이언스북스, 2020.)
[보이저 1호 탐사선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와 인류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교훈적인 내용의 책]
[2] Becker, 1974, p. 3.
[3] Sheldon Solomon, Jeff Greenberg and Tom Pyszczynski, The Worm at the Core: On the Role of Death in Life, Random House, 2015, p. 49 (번역본 쪽번호). (슬픈 불멸주의자, 이은경 역, 흐름출판, 2016.)
[공포관리이론에 대한 30년간의 연구결과를 명료하게 압축한 책. 이론을 개관하기에 적합하다. 베커의 책이 출판된 지 43년 후에 출판되었지만 베커의 생각이 아직 유효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번역본에서 Otto Rank가 ‘오토 랭크’, 즉 영어식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인임을 감안하면 ‘오토 랑크’가 올바른 표기일 것이며, 실제 그렇게 표기되고 있다.]
[4] Weiner, 2010, p. 49. (번역본 쪽번호)
[5]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5, p. 365.
[20여 년 동안의 깊은 연구를 통해 수메르어를 비롯 다른 고대어를 해독하여 길가메시 서사시를 해설과 함께 소개하는 역작]
[6] Sigmund Freud, “Thoughts for the Times on War and Death,” pp. 275-300, 1915.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The Hogarth Press, 1957, p. 288.
[1차 세계전쟁을 통해 본 프로이트의 전쟁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담은 논문. 베커가 논지와 통하는 영웅주의의 단서도 보인다.]
[7] 이 책은 어떤 정치적 견해도 담고 있지 않다. 죽음과 관련된 여러 현상에 대해 기술하고, 반성적 사고를 해보려는 목적만 있다.
[8] Becker, 1974, p. 26.
[9] Becker, 1974, p. 11.
[10] Freud, 1915, p. 296.
[11] 이 통계자료는 챗GPT에게 물어 얻은 것이다(세게 통계(World Statistics)의 자료를 참고했다고 알려 준다). 별도로 참고한 한국선교연구원의 [세계 선교 통계] 자료도 인구수에 차이는 보이지만, 종교인 비율은 비슷한 값을 보여주고 있다. 비율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31.1%), 이슬람교(24.9%), 힌두교(15.2%), 불교(6.6%), 민속종교(5.6%), 기타 종교(1%). 이 책에서 자료습득을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한 두 번의 사례 중 하나다.
[12] Solomon et al., 2015, p 6. (번역본 쪽번호)
[13] 이들은 30년에 걸친 자신들의 연구결과의 주요 내용을 2015년 길지 않고 읽기 까다롭지 않은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슬픈 불멸주의자>란 제목으로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원본의 제목은 <A Worm at the Core: On the Role of Death in Life>인데, 인간의 깊은 내면 속에 제거할 수 없는 벌레처럼 상주하는 죽음, 그리고 죽음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책 제목에서 드러내고 있다.
[14] Abram Rosenblatt, Jeff Greenberg, Sheldon Solomon, Tom Pyszczynski and Deborah Lyon, “Evidence For Terror Management Theory: I. The Effects of Mortality Salience on Reactions to Those Who Violate or Uphold Cultural Valu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7 (4), 681-690, 1989.
[TMT를 강화하는 실험 설계와 결과가 담겨있는 초기 연구논문]
[15] Lehrer, Jonah, “Fear, Death and Politics: What Your Mortality Has to Do with the Upcoming Election,” Scientific American, Oct. 23, 2008.
[공포관리이론(TMT)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쉘던 솔로몬 교수의 Scientific American의 인터뷰 기사. 죽음의 공포에 노출된 미국시민의 들의 반응, 예를 들면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복수를 천명한 부시 대통령의 유례없는 지지율 등의 상승 사례를 통해 TMT를 설명하고 있다.]
[16] 惡이란 한자는 무덤의 묘실을 나타내는 亞와 心이 결합된 것으로 풀이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의 표현이다.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악의 근저에 죽음이 있다는 것이 문자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17] Ernest Becker, Escape from Evil, The Free Press, 1975, p. 98.
[사후에 출간된, <죽음의 부정>과 연장선 상에 있는 베커의 역작. 개인과 사회가 저지르는 악의 근원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불멸 영웅주의에 있다는 베커의 통찰을 담고 있다.]
[18] J. Greenberg, S. Kosloff, S. Solomon and M. Landau, “Toward Understanding the Fame Game: The Effect of Mortality Salience on the Appeal of Fame,” Self and Identity, 9(1), 1-18, 2008.
[죽음 현저성에 노출된 피험자들이 명성에 대한 관심과 욕망을 더 많이 보인다는 것을 TMT에 근거하여 논증하는 논문]
[19] Becker, 1973, Ch. 6.
[20] N. Mandel, and S. J. Heine, “Terror management and marketing: He who dies with the most toys wins,” Advances in Consumer Research 26, 527-532, 1999.
[죽음을 생각하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사치품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TMT 논문]
[21] C. D. Routledge and J. Arndt, “Creative terror management: creativity as a facilitator of cultural exploration after mortality salience,” Personal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5, 493–505, 2009.
[죽음 현저성에 노출되면 창조성에 대한 욕구가 증가한다는 TMT의 실증 논문]
[22] Otto Rank, Art and Artist: Creative Urge and Personality Development, W. W. Norton & Company, 1989.
[이 책의 독일어 버전은 1932년에 출판되었다. 이 서지정보는 1989년 출판된 영어 번역본이다. 독일어 원본을 읽을 수 있는 언어능력이 없어 영어 번역본에 의존했다. <죽음의 부정>은 오마주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오토 랑크에 대한 베커의 존경을 담고 있다.]
[23] E. van der Nagel, M. Arnold, B. Nansen, T. Kohn, C. Bellamy and N. Clark, “Death and the Internet: Consumer Issues for Planning and Managing Digital Legacies,” Australian Communications Consumer Action Network, 2017.
[소셜 미디어 같은 디지털 수단에 의해 죽음 불안을 관리한다는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 논문에서는 ‘온라인 페르소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온라인 캐릭터’, ‘아바타’와 같은 말이다.]
[24] Becker, 1974, pp. 266.
[25] 같은 책, p. 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