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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02. 2021

개천에서 용 날까?

너네 아빠는 짱깨들이랑 에어컨도 없는 공사판에서 땀 흘리면서 일하잖아. 우리 아빠는 한국 사람들이랑 에어컨 빵빵하게 튼 사무실에서 시원하게 일해.


내가 국제 학교로 전학을   얼마  됐을  나는  한국인 친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중  친구가 내뱉은  말을 나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러한 가치에 의해 친구를 폄하한다는 ,  번쯤은 집에서 부모님께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일 거라는 것보다  충격적이었던  물어보니  친구의 아버지는 부서가 달랐을  누구나 들으면 아는 국내 제일 가는  대기업에 다니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11살 때 처음 중국 천진으로 가게 되었다. 아빠는 이미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와 떨어져 천진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아빠는 크지 않은 전자회사를 다니셨다. 지금도 같은 회사를 다니신다. 아빠가 기러기 생활을 한지 한 3년쯤 됐을 때 거의 우리를 키우다시피 하신 친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의료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엄마와 나와 내 동생은 아빠가 사는 낯선 땅 천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첫 일 년은 한국 학교에 다녔고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국제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발령을 받아 외국으로 이사한 집들과는 다르게 지극히 평범했던 우리 집은 사실 날 국제 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저 날 싫어했던 친구들이 공책에 내 얼굴을 그리고 그 얼굴을 칼로 그은 걸 보시고는 내가 잠시 다른 곳에 가 있길 바라셨던 것 같다. 공부 머리가 좀 있는 것 같으니 혹시나 본인들과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와 함께.


외국인들이 가득했던 학교에서 'Helllo. Nice to meet you. How are you? Thank you and you?' 밖에 몰랐던 내가 영어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생활해야 했던 것보다 힘들었던 건 직접적으로든 또는 간접적으로든 내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걸 매 순간 느꼈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잘 사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는데 사는 집도 입는 옷도 먹는 음식도 모든 게 내 눈에는 럭셔리 그 자체였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곁에 있다 보면 그들과 조금은 비슷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학교 가는 게 정말 좋았다. 학교는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고 나는 수업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수업 외 시간에도 학교는 많은 걸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고 호기심이 많은 나는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뮤지컬도 세우고 봉사도 하고 환경, 인권, 국제 관계 등의 문제와 방안에 대해 토론했다. 분명 분에 넘치게 행복했다. 하지만 매 학기 끝 무렵 즈음 나는 부모님과 학교에 더 다닐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고 나는 상처를 받았다. 우리 집은 날 국제 학교에 보낼 만큼 돈이 많지 않다는 것도, 내가 더 다니려면 그만큼 모두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도 나를 항상 죄인으로 만들었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매 학기 학비를 낼 돈이 없어 안절부절못하신 부모님을 조르고 조른 게 지금 나를 이렇게 후회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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