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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02. 2021

분수에 맞게 산다는 건 뭘까?

학교를 다니면서 우리 가족은 점점 힘들어졌다. 아빠는 회사에서 일하고 매달 미리 얼마씩 나눠서 가불을 받아오기 바쁘셨고 엄마는 없는 돈 아껴 살림을 꾸리기 바쁘셨고 동생은 언니 잘난 학교 보낸다고 바쁜 집에서 상처받기 바빴다.


동생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동생은 내가 국제 학교로 옮기면서 중국 학교로 옮기게 됐다. 매주 월요일에 红领巾(빨간 머플러)을 매고 학교를 가던 동생은 지금까지도 빨간색을 제일 싫어한다. 동네에서 한국 학교 또래 친구들이 보고 놀릴까 봐 너무 싫었다고 한다.


너네 엄마는 왜 그렇게 분수에 안 맞게 산다니? 너네 엄마는 너는 없고 언니만 있다니? 너도 기사님이라도 붙여달라고 해.


내가 나를 태우러 온 스쿨버스를 타고 떠나면 한국 학교 아줌마들은 왕복 한 시간을 걸어 학교를 다녔던 동생을 잡고 저런 말들을 하셨다고 한다. 그냥 흘려듣기엔 동생이 너무 어렸고 진짜 엄마 아빠가 날 별로 사랑하지 않는 걸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는 국제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나밖에 없었다. 엄마한테는 그렇게 모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다들 엄마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엄마는 자주 울었다.


다시 동생 이야기로 돌아와서, 동생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 차별 아닌 차별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동생과 사소한 걸로 다투다가도 ‘언니는 좋은 학교 다니잖아’ 하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눠 신으라고 운동화 하나도 동생 발 사이즈에 맞춰서 사주셨다. 나는 내 발 사이즈를 대학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방을 같이 썼는데 한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이야기 나눌 수 없었다면 아마 나는 동생의 원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옆에 누구 없이 자는 게 세상 어색하다.


그렇게 5학년이었던 나는 10학년이 되었다. 일 년 정도만 나를 국제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부모님께 10학년이 되면 장학금을 받아내겠다고 나는 매 학기 졸랐고 그렇게 불어난 부모님의 빚과 함께 나는 10학년이 되었다. 장학금 신청 기간이 되어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는 기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이 울어야 했다. 처음으로 우리 집 소득을 일의 자리 수까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 숫자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작아서 놀랐다. 나를 국제 학교에 보낼 형편이 진짜 안된다는 걸 어렸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장학금을 못 받게 되면 내가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더 간절했다. 학교 가는 게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정말 좋았으니까.


면접은 너무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고작 17살이었던 내가 교장 선생님과 처음 보는 이사진 앞에서 나에게 왜 장학금이 꼭 필요한 지 설명하는 모습은 자기 어필보다는 구걸이었다. 사실 학비를 제때에 낸 적이 없어 교장 선생님과 웬만한 선생님들은 다 우리 집 형편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내가 받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그걸 알고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사람들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내 입으로 해야 했다. 면접 자리에서만큼은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눈물을 참고 참았다.


학교에 남고 싶어요...


발표가 있던 날, 난 내 이름을 보고 울고 교장실에 가면서 울고 교장 선생님께 장학증서를 받으면서 울고 나와서도 한참을 울었다. 넘지 못할 산을 넘은 기분이었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쟤는 우리가 낸 학비로 학교 다니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같은 학년 친구의 엄마가 그때 친구에게 한 말을 듣고 말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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