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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02. 2021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국제 학교에서 12학년까지 마치게 됐다.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진학할 대학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볼 때 미국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그래도 영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대학 중 학비가 그나마 싼 홍콩 정도는 넣어는 보자 해서 원서를 썼다. 홍콩대 저널리즘 학과에 붙었다. 분명 기쁜데 기쁘지 않았다.


대학 안 갈래요.


아빠는 항상 나와 내 동생에게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게끔 하셨다. 식탁에 둘러앉아 내 차례가 오면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떠한 기자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도 꿈은 있었다.


그런데 학비가 너무 비쌌다. 홍콩대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보다 학비가 싸면  하나. 사실 부모님 입에서 힘들겠다는 말을 듣기  내가 먼저 선수 쳤는지도 모른다. 내가  간다고 해서 충격이셨겠지만 간다고 해도 걱정이셨을 거다. 부모님께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지쳐 보였다. 이젠 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미  욕심이 과했다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부모님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 대화의 결이 하루하루 너무 다 달라서 글로 표현해 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홍콩대에 갔다.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가야 할 것 같았다. 끝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몇 년 동안 본인들이 가진 모든 걸,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걸 쏟아부어 나에게 투자를 하신 거라고 생각해 보니 내가 가는 게 맞았다.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게 아닐까 그제야 느꼈다. 부모님께서는 가불을 더 받아 학비를 내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낯선 땅 홍콩에 가게 되었다. 생활비랑 기숙사비는 내가 벌어야겠다고 다짐했고 딱 한 달의 적응 기간 후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며 돈을 벌었다. 수업 외 시간에 치킨집 알바, 한식집 알바, 과외 알바, 통역 알바 등을 했는데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중,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내가 조금이라도 부모님이 지고 계신 짐을 덜어드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물론 손톱의 때 정도였겠지만.


하루살이처럼 하루 벌고 하루 쓰다가 갑자기 큰돈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내가 도움을 청할 곳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난 죽기 살기로 일했다. 유학 생활에 대한 기억은 일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홍콩대생이었으니 홍콩대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저널리즘 학과는 매년 전 세계에서 30명의 학생만 뽑았다. 작은 규모의 학과여서 정말 다들 가족같이 지냈다. 교수님들은 현직에 계셨던, 또는 아직도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교과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많이 배웠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취재하고, 글을 쓰고, 사진과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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