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 Apr 02. 2021

무인도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일만 했는지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루에 두 탕은 기본이었다. 방학 때는 더 많이 일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일자리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됐다. 나는 내가 낯을 가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싹싹함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싫으면 싫은 게 다 티 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게 웃긴 게, 상황에 맞춰 마치 원래 그랬던 양 변했다. 그게 원래 나면 어떻고 아니어도 어떠하리. 난 내가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되게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잘 울지도 않았다. 원래는 마음이 약해서 많이 우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할머니가 눈 밑에 있던 점을 그렇게 빼라고 했었는데.


나는 비위가 엄청 약한 편이었다. 내가 먹은 걸 정리하다가도 구역질을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알바하면서 싹 고쳤다. 손님이 남긴 음식으로 서서 저녁을 급하게 해결했던 때도 많았다. 그럴 땐 그냥 맛있게 먹었다. 배고팠으니까. 그 정도였는데 뭐 손님이 남긴 음식을 정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화장실 청소며 토로 더럽혀진 복도 청소며, 아무렇지 않았다. 비위가 좋아진 건 매우 마음에 든다.


시험기간 때는 그래도 며칠 알바를 쉬었다. 시험 준비에 남들처럼 평소에 해둔 거 플러스 몇 주 내내는 아니어도 며칠은 쓰고 싶었다. 나는 그제야 학교 도서관에서 동기, 선후배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공부하는 걸 보게 됐는데 나중에는 그 모습이 마음 한 편에 부러움으로 남더라. 생계형 알바를 하는 친구는 많지 않았고 알바를 하는 친구들 중에는 몇 달 빠짝 일해 명품 백을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것도 그럴게, 잘 사는 친구들은 홍콩대에 더 많았다.


나한테는 졸업장을 따는 것만큼 중요했던 게 빨리 졸업을 해서 학비를 덜 내는 것이었다. 빠른 졸업을 위한 계획을 1학년 때 다 세웠다. 4년제 대학이었으니 4년 동안 필수로 들어야 할 수업, 선택할 수 있는 수업, 이수해야 할 학점, 프로그램 등을 다 파악하고 3년 안에 졸업하는 걸 목표로 두고 계획을 세웠다. 생각해 보면 참 대견하기도 하다. 결국 3년 안에 졸업을 했으니까. 지금도 내가 3년 만에 졸업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수재인 줄 안다. 공부 진짜 잘했나 보다고 말한다. 전혀 아니다. 학점은 똥망이었다.


내가 2학년 때, 3년 안에 졸업하려면 지금부터 인턴을 해야 졸업하고도 취업을 바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여러 기회를 알아보던 중,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AP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원래 하던 알바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숙사에서 방을 빼줘야 했다. 홍콩의 집값은 어마 무시했다. 그때부터 나는 수업도 거의 가지 못하고 낮에는 AP에서 일하고 밤에는 알바를 뛰었다. 30명밖에 없으니 누구라도 결석을 하면 다 표가 났지만 교수님들은 친구들이 해준 대리출석을 알면서도 넘어가 주셨다.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다들 알고 계셨다.


그렇게 AP에서 7개월의 인턴 생활을 마치고,  마침 AFP에서 인턴 모집 공고가 나서 지원한 결과 합격했다. 그렇게 AFP에서 3개월을 인턴으로 일하다 졸업을 앞두고 프리랜싱 제안을 받아 1년을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CNN에서도   정도 일할 기회가 생겼다. 외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풀어보겠다.


무일푼으로 일했던 인턴 때와는 다르게 프리랜서가 되고서는 돈을 받았지만 그래도 집값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작은 집을 세 명이서 나눠 썼는데도 월세만 인당 100만 원 정도였다. 밤낮으로 일하다 보니 나에게도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AFP에서 일하고 끝나자마자 새벽 3시까지 알바를 뛰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새벽에 일 끝나고 나도 모르게 부둣가에 찾아가 한참을 서성이다 주저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나를 계속 죽였다. 무서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