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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Sep 16. 2022

땡큐! 토기장이

미래의 어느 날 지구의 과학자들이 모여 토론을 했다. 

그들은 이제 인간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신은 인간에게 더이상 필요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과학자 대표가 신에게 가서 말을 했다. “신이여, 이제 우리는 당신이 필요 없다고 결정했소. 우린 인간을 복제할 수 있고 생명을 창조할 수도 있게 되었소. 이제 인간에게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서 사는 게 어떻겠소?” 

신은 과학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다가 대답했다. “좋다, 그럼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내가 태초에 아담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이 한번 해보게나.” “문제없죠!” 과학자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흙덩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신이 말했다. “아니지, 내 흙 말고 너희 흙으로 해!”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져다가 빚어서 여러 모양의 그릇을 만든다. 

작은 그릇, 큰 그릇, 화병도 만들고, 때로는 항아리도 만든다. 

고려 시대 장인의 손을 거친 청자를 보면 천 년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못 믿어질 정도로 정교하고 청아한 아름다움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옹기로 만들어진 아무 모양을 새기지 않은 국그릇도 토기장이의 정성이 들어가 있다.


토기는 토기장이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진다. 토기장이가 아주 작은 술잔을 만들고 싶으면 진흙을 조금만 가져다가 물레를 돌리면서 모양을 다듬고 큰 항아리를 만들려면 큰 진흙을 물레에 붙이고 손으로 빚는다.

흙도 토기장이의 선택을 받아서 청자, 백자, 옹기, 석기 등의 흙 재료가 완성품에 따라서 선택된다. 그릇은 선택권이 없다. 그저 만들어지는 대로 쓰임을 받을 뿐이다. 작은 접시가 되었든, 큰 항아리가 되었든, 아니면 상감청자가 되었든. 때로는 잘 만들어졌더라도 토기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마에서 나오자마자 박살이 나서 명(命)이 조기에 끊어지기도 한다. 

그릇은 불만이 없다. 이상하게 생긴 주전자가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항의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물을 저장하고 나누어 준다.     


우리는 토기와 같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양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누구에게 항의할 것인가? 부모마저도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졌다면? 수억 개의 선택지 중에서 나를 선택했고 모양을 빚고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면? 우리의 손, 발, 얼굴, 코. 숨결과 목소리. 

무(無)에서 유(有)가 되었다. 나는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 

때로는 기쁨도 있고 때로는 슬픔도 느끼면서 무언가가 되었다. 이것은 기쁨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기쁨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경험이다. 거기다가 잠시, 아니 단 하루가 아니라 긴 시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 것이다.


그러면 만일, 토기장이가 있다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산의 존재를 모른 채,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의 존재를 모른 채, 그리고 나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모른 채, 그냥 무(無)인 채로 있을 뻔했다. 

전기자동차, 비행기에 몸을 실어 보지도 못한 채, 스마트폰으로 쇼핑을 해보지도 못한 채, 그냥 어둠 속에서 파묻혀 있을 뻔했다.


존재론(存在論)에 대해서 굳이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나의 존재는 확실히 신기하고 경이롭다. 내가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들은 분명히 놀랍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모두가 나를 잊었을지라도 나는 슬프지 않다. 만일, 토기장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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