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싶을 만큼 이질적이다. 암투병과 연애.
검진 결과를 알고, 수술을 받고, 암진단을 받았을 때까지 나에겐 애인이 있었다.
수술받기 전날에 폰에 썼던 메모가 있다. 참 풋풋하고 예쁘다.
**야.
지금 나는 자려고 누워있어
앞자리에는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려오신 할머님이 힘겹게 호흡을 이어가고 계셔.
상주하는 가족분들이 안 계셔서 간호사분들이 챙겨 주시는 상황인 거 같은데,
말씀도 못하시고 앙상한 몸에 많이 괴로우신 것 같아
열두 시가 넘어도 불이 환해
정말 많이 아픈 사람들이 많아
간호사 선생님들은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니시고
보호자들은 연신 왔다 갔다 해
우리 아프지 말자
더 건강하자
아프고 싶어서 아플 일은 없겠지만
서로를 생각해서라도 더 조심하고 더 신경 써주자
그럴 일은 없다는 거 아는데
큰일이 아니라는 거 아는데
그냥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것도
예상했던 일이 아니니까
자긴 아마 내가 오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음 (쓰면서도 그렇다고 생각은 해 ㅋㅋㅋ)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보려고 해
사랑해
응 사랑해
나는 너의 연약함도 너의 강함도 다 사랑해
사랑해서 잔소리하는 거라고 생각해 줘서 고맙고
뭐부터 시작해서 끝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 알아주고 내 사랑받아주고
그리고 이렇게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지만 정작 너무 어린애 같은
이런 모자라는 나를 항상 예뻐해 줘서 고마워
아침에 일어나서 못난 얼굴도 귀여워해줘서 고마워
잘난 거 하나 없는 나를 자랑스러워해 줘서 고마워
내 이름을 늘 다정하게 불러줘서 고마워
내가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을 때도
날 보고 있어 줘서 고마워
다시 날 잡아 주고 늘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워
항상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내가 작아지고 낮아질 때마다 날 안아줘서 고마워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해 줘서 고마워
그래서 날 소중히 여기게 되었어 고마워
날 위해 울어주어서 고마워
병원에도 편하게 못 오게 하는 애인인데도
이런 애인 이야기도 편하게 할 친구도 많이 없어서 미안해
승진 축하한다고 제대로 말 못 해줘서 미안해
그저 자기 몸 너무 힘들까 봐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줘
자긴 잘할 거야
내 애인이잖아 일하는 모습이 너무 근사한 너.
나는 아침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자기 머리 좋아해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 낀 얼굴도 귀여워
내가 해준 음식 맛있게 먹으면 기분 좋아
그래서 더 해주고 싶었어
맛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가 봐
상처 준 게 있으면 미안해
나도 하나씩 고치려고 노력할게 지켜봐 줘
머리를 내려도 올려도 좋아
자기가 무표정으로 있으면 섹시해
그러다 나 보고 배시시 웃으면
뽀뽀해주고 싶어
아직도 난 자기 손잡을 때 설레고 그래
두 번째 만난 날
그때 그 공기 느낌 내 모습 자기 표정
다 기억나
가끔 새삼 신기하지 않아?
스치는 인연이 아니었다는 게
나는 자고 있는 자기 얼굴에 뽀뽀하는 게 참 좋아
자기가 되게 예쁘게 웃거든
내가 자길 사랑하는 걸
자기도 안다는 듯이 웃어
그럼 엄청 행복해
우리 곧 900일이다
뭔가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아
참 다사다난했어 그치!
900일은 함께 보내지 못해도
우리 9000일, 90000일은 같이 보내자.
아무것도 후회하는 게 없어
자기 만나서 난 너무 행복했어
앞으로도 우리 행복하자
계속 내 옆에 있어줘요
사랑해
잘하고 올게
걱정 마 자기 애인이잖아
다녀올게요
항암 치료를 앞둔 전날, 우리는 헤어졌다.
모두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거라고 말했다. 내 성격에 상대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서 그랬을 거라고.
하지만 상대는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했다.
사실은 이런 내가 짐이 되는 것 같아, 놔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말을 꺼냈을 때 너는 정말 많이 울었고, 그 눈물에 거짓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우리'라는 이름으로 잡았던 마음이라면, 그렇게 계속 단단했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변했다.
승진으로 일이 많아진 너는 더 바빠졌다. 내가 아플 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애인인 게 견딜 수 없었는지 이별을 입에 올렸다. 시련과 역경을 지나 더 단단해질 우리 사이를 꿈꾼 건 나뿐이었나보다.
부모님 집이었고, 조용히 나지막하게 통화를 나누던 순간이 기억난다. 울음을 참고 침착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내 항암 전 날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기억하라고 절대 잊지 말라고.
누굴 만나도 그렇게 나쁘게 헤어진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정말 그랬다. 말 그대로 저주였다.
아마도 그런 큰 일을 겪어낼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망치고 싶다는 사람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관련된 모든 번호를 차단하고,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메신저를 통해 너에게 연락을 받았다.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 있냐며, 자신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건데 기다려줄 수는 없었냐는 둥의 말이었다.
내가 가장 힘들 때는 도망가더라도 자신이 힘들 때는 내 존재가 필요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거기까지인 사람이었다.
신이 준 기회 같았다.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릴 수 있는 계기였다.
돌이켜보면, 힘든 암투병을 견디게 해 줬던 가장 큰 공신은 전애인이었다. 구토가 올라올 때, 정신을 잃을 것 같을 때마다 내 뺨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버텼다. 얼른 건강해져서 잘 살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다.
물론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로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살기 위해 정신과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