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미흘라피나타파이 : 우리는 눈으로 이별했다

by 에반 환 Evan Hwan


남미 대륙의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 제도의 바람은 무거웠다.


펭귄조차 둥지를 틀기 주저할 법한 이 척박하고 얼어붙은 땅.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의 낡은 산장 카페에서, 나는 완전히 식어버린 커피잔의 테두리만 엄지손가락으로 멍하니 문지르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빙하의 칼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내 신경은 오직 등 뒤의 낡은 나무 문에 쏠려 있었다.


끼이익-

거센 눈보라 소리를 뚫고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들이닥친 하얀 냉기와 함께 한 여자가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두꺼운 파카에 묻힌 좁은 어깨,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뺨,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는 일순간 굳어버린 검은 눈동자.


서연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던 서울의 그 시린 겨울로부터, 정확히 3년이 흐른 참이었다.


"……오랜만이네."


서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엉거주춤 주저앉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녕. 잘 지냈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지. 머릿속을 맴도는 수백 개의 다정한 문장 중에서, 내가 밖으로 꺼낸 말은 결국 가장 멍청하고 건조한 한마디였다.


"앉아. 커피 새로 시켜줄게."


소설가라는 직업이 이토록 무색해지는 순간이 있을까. 수십만 자의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서사를 주무르던 나는, 정작 내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마다 지독한 문맹(文盲)이 되곤 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테이블 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어색한 공기만 들이마셨다.

이 지독한 침묵. 나는 이 침묵의 이름표를 알고 있다.


과거, 언어학자인 서연이 내게 가르쳐 주었던 수많은 멸종위기 언어 중 하나. 바로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곳, 티에라델푸에고의 원주민인 야간(Yaghan)족이 쓰던 단어였다.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뜻이 긴 단어'로 등재되기도 했던 그 기묘한 발음의 명사.


마미흘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서로에게 꼭 필요하고, 서로가 간절히 원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먼저 입 밖으로 꺼내거나 행동으로 옮기기는 싫어서 상대방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교환하는 눈빛.'


야간족은 이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얄팍한 마음을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했다. 화자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아 이제는 화석이 되어버린 죽은 언어.


하지만 3년 전 그날,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그 멸종된 단어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우리의 이별에는 고함도, 눈물도, 흔한 연인들의 원망 섞인 말다툼조차 없었다.


3년 전 겨울, 혜화동의 작은 찻집. 우리는 식어가는 홍차를 사이에 두고 장장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무심한 퇴근길의 자동차 불빛들만 명멸하고 있었다. 나는 서연이 먼저 "우리 다시 생각해 보자"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내 소설의 첫 독자였고, 내 불안한 세계를 유일하게 해석해 주던 번역가인 그녀를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알량한 자존심은 끝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랑을 이겼다.


서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테이블 아래로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꽉 쥐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길 잃은 아이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좀 붙잡아줘. 가지 말라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해줘.' 그녀의 두 눈은 나를 향해 그렇게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와 언어로 밥을 먹고사는 소설가. 세상에서 가장 말을 잘 다루어야 할 두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서로의 마음을 가장 오독(誤讀)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워 '침묵'이라는 가장 단단하고 비겁한 방패 뒤로 숨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입술 대신 눈으로 이별했다. 슬프도록 완벽한 마미흘라피나타파이였다.


"여기, 아직도 그 단어를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을까."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것은 서연이었다. 그녀의 붉어진 시선은 나를 향하는 대신, 창밖의 거대한 빙하를 향해 있었다.


이번 '멸종위기 언어 수집 프로젝트'의 공동 연구자와 기록관 자격. 우리는 일이라는 핑계로 다시 묶였다. 이 알량한 명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영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한 채 각자의 우주에서 고립되어 늙어갔을 것이다.


"글쎄. 마지막 화자가 죽기 직전이라고 들었는데."

"만약 그 사람이 죽으면, 그 단어도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겠지.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사전에 기록되잖아. 네가 지금 그걸 하러 온 거고, 나는 그걸 글로 쓰러 온 거고."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3년 전, 나를 끝없는 자책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원망인지, 미련인지, 혹은 아직 다 비워내지 못한 깊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시선.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3년 전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사전에 활자로 박제된 것은 죽은 언어에 불과하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않는 이상, 관계는 영원히 박제된 채 무덤 속에서 썩어갈 뿐이다.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3년 전 그날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잔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내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말을 천천히, 아주 또렷하게 밀어냈다.


"서연아."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녀의 좁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아직도, 그날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는지 모르겠다."


창밖으로 짐승의 울음 같은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티에라델푸에고의 바람 소리가 산장을 통째로 삼킬 듯 거세졌지만,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우리 사이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고요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그러나 가장 폭력적이었던 3년 전의 그 침묵이 마침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마미흘라피나타파이는 끝났다. 이제는 자막 없는 서로의 침묵을, 온전한 우리만의 언어로 번역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