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
3년 전 겨울, 그날도 서윤은 소란스러운 말 대신 가장 짧고 명확한 단어를 골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고,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활자처럼 건조했다.
우리가 3년 동안 함께 살던 15평 오피스텔. 거실 한복판에는 이삿짐센터 직원이 놓고 간 빈 종이 박스 하나가 묘비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앉아 있었고, 그녀는 베란다 창가에 서서 나를 등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오후 4시의 비스듬한 겨울 햇살이 길게 늘어져 거실 바닥을 두 동강 내고 있었다. 햇살의 경계선 이쪽에는 내가, 저쪽에는 서윤이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나는 소설가였고 그녀는 언어학자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내가 쓴 수십만 자의 허구와, 그녀가 수집한 수만 개의 멸종위기 언어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말(Language)을 다루고, 문장을 해체하고, 감정을 활자로 번역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사이의 언어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여느 연인들처럼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가 될 밑바닥의 언어를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지도,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지며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저 닫힌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과,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서늘한 시선, 그리고 지독한 침묵으로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을 뿐이다. 문맹(文盲)들의 사랑. 우리의 3년은 그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 세 글자가 내 이성의 필터를 거쳐 현실로 인식되기까지 시간벌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때 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오후 4시의 옅은 햇살이 그녀의 얇은 각막을 투명하게 비췄다.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와 달리, 짙은 갈색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미세하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에겐 '자막'이 필요했다.
외국어 영화를 볼 때 화면 아래에 깔리는, 오해의 여지 없이 명확하고 친절한 하얀색 텍스트 말이다.
나를 향한 서윤의 흔들리는 눈빛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네가 나를 방치해서, 내가 너무 외롭고 지쳐서 홧김에 뱉은 말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안고, 가지 말라고 잡아줘.)
그녀의 눈동자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물풍선 같았다. 내가 바늘 끝만 한 다정함으로 찔러주기만 해도, 금방이라도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으로 무너져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멍청하게도 그 간절한 눈빛을 완전히 오역(誤讀)했다. 잔뜩 웅크린 내 자존심이 만들어낸 나의 자막은 비겁하게도 전혀 다르게 읽혔다.
(이제 그만 끝내자. 나는 변하지 않는 너에게 완전히 지쳤어. 더 이상 구차하게 매달려서 내 남은 정까지 떨어지게 만들지 마.)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지웠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더 깊숙이 기대며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그것이 상대방의 확고한 이별 통보를 쿨하게 존중하는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착각했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삼류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 알량한 직업병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 역시 굳게 다문 입술 대신, 서늘한 눈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군말 없이 보내줄게.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다.)
나의 눈빛을 읽어낸 서윤의 어깨가 일순간 흠칫 굳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15평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서로가 간절히 원하고 있으면서도, 먼저 진심을 꺼냈다가 처참하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서로의 입술만 바라보던 시간.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네가 먼저 내 마음을 알아채 주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고도 폭력적으로 교환했던 그 눈빛.
그게 바로 티에라델푸에고의 원주민들이 쓰던 멸종위기어 '마미흘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의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완벽한 예시였다는 걸, 언어학자인 그녀도 소설가인 나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고 써내려가던 활자 안에 갇혀, 정작 살아 숨 쉬는 서로의 마음은 읽어내지 못하는 바보들이었다.
그 짧은 침묵의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수만 개의 문장이 태어났다가 속절없이 폐기되었다. '가지 마'라는 세 글자를 발음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성대 주변을 맴돌던 목소리는 끝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모래처럼 흩어졌다. 냉장고의 낮은 기계음과 창틀을 때리는 건조한 겨울바람 소리만이 우리의 텅 빈 거실을 배회했다. 나는 그녀가 남겨둔 이삿짐 박스 위로 위태롭게 내려앉는 먼지들을 멍하니 응시하며, 내 안의 무언가도 저렇게 소리 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벽을 등진 책장 속, 내가 쓴 수백 개의 이야기와 그녀가 모은 수천 개의 단어들이 그 순간만큼은 한낱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사랑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앞에서는 그 어떤 화려한 수사여구도, 정교한 언어학적 분석도 우리를 구원할 구명조끼가 되어주지 못했다. 우리는 얄팍한 자존심이라는 무거운 닻을 내린 채, 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기어코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의 짧고 건조한 대답이 허공에 흩어지자, 서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두 눈에 그득하게 고여 있던 기대감이라는 이름의 빛이, 퓨즈가 나간 백열등처럼 탁 하고 꺼지는 것이 보였다.
서윤은 창백해진 입술을 꾹 깨물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한 채 바닥에 놓인 자신의 작은 캐리어를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쾅-.
오래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거운 둔기처럼 내 심장을 정통으로 때렸다.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나의 긴장감도 끊어졌다. 나는 소파 위로 무너지듯 쓰러져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것이 새어 나왔지만, 이미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수만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사랑해', '가지 마'라는 가장 평범하고 쉬운 단어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두 사람. 우리는 침묵에는 유창했지만, 마음에는 지독한 문맹이었다.
(3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