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언어가 산 자를 깨우다

by 에반 환 Evan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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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재. 남미 대륙의 최남단,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의 공동묘지.


티에라델푸에고의 거친 바람은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검은 우산과 코트 자락을 무자비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3년 전, 15평 오피스텔에서의 짧고 파괴적이었던 이별의 회상에서 빠져나오자, 피부를 도려내는 듯한 칠레의 칼바람이 다시금 현실의 감각을 서늘하게 일깨웠다. 과거로의 회상은 찰나였지만, 그날 이후 내가 홀로 견뎌온 후회와 자책의 시간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빙하의 나이만큼이나 길고 무거웠다.


저만치 앞서 걷는 서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앙상한 어깨를 감싼 검은 코트 자락이 거센 바람에 맹렬하게 펄럭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서둘렀다. 이대로 그녀가 묘역을 빠져나가 렌터카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해 차 문을 닫아버린다면, 우리는 또다시 3년, 아니 어쩌면 남은 평생을 지독한 침묵이라는 감옥에 갇혀 각자의 섬에서 늙어가게 될 것이 뻔했다.


내 시선은 다시 무덤 쪽, 깊게 파인 구덩이로 향했다.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소박한 목관 위로 젖은 흙이 무겁게 덮이고 있었다. 삽질 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의 탄식이 바람에 흩어졌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야간(Yaghan)어 화자의 죽음. 그것은 인류가 가진 거대한 도서관 하나가 영원히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언어학자들의 절망어린 탄식이었다.


이제 사전 속 활자로만 남게 된 '마미흘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그 길고 기묘한 단어의 온도와 질감을, 그 미세한 떨림과 눈빛의 각도를 온전히 발음하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 아직 살아있다.

저기 얼어붙은 자갈길을 도망치듯 걷고 있는 여자와, 그 뒷모습을 미련하게 바라보며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 우리는 그 멸종된 단어의 가장 완벽하고도 비극적인, 살아 숨 쉬는 증인이었다. 서로가 간절히 원하면서도 먼저 다가가지 못해 영원히 엇갈려버린, 상처받을까 두려워 뻗지 못한 두 손의 현현(顯現)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으니까.


갑자기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실소(失笑)가 비집고 나왔다. 지독하게 비릿한 자조였다. 나는 소설가랍시고, 서윤은 언어학자랍시고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멸종위기 언어를 애도하겠다고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며 이 척박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왔다. 그런데 정작 내 인생에서 가장 처참하게 멸종되어 가는 사랑 하나, 그 소중한 관계 하나는 끝내 지키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니. 사전에 박제된 죽은 언어를 주워 담기 전에, 부패해 가는 내 마음부터 구해야 했다. 수백만 개의 활자 뒤에 숨어 비겁하게 살아온 지난 3년의 죗값을, 비로소 치러야 할 때였다.


나는 꽉 쥐고 있던 취재 수첩을 코트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그리고 굳어버린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뗐다. 처음에는 느린 걸음이었으나, 이내 뜀박질로 변했다.


타닥, 타닥, 콰직.

얼어붙은 자갈밭을 짓밟는 구두 소리가 엄숙한 묘지의 정적을 무례하게 깨뜨렸다. 조문객들의 의아한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갈비뼈 안쪽에서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터질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영하의 날씨에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날카롭게 찢어놓았지만, 그 찌릿한 고통조차 지금 내게는 내가 살아있다는, 아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로 느껴졌다.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주차장이 코앞이었다. 나는 찢어질 듯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억눌러두었던 이름 하나를 세상 밖으로 힘껏 토해냈다.


"서윤아!"


3년 만이었다. 입안에서 점액처럼 맴돌기만 하던 그 세 글자가, 뼈와 살을 가진 온전한 음성 언어가 되어 공기 중으로 폭발하듯 퍼져나간 것은.


거센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에 묻힐 뻔했던 나의 절박한 목소리가 마침내 그녀의 좁은 등에 가닿았다. 서윤의 잰걸음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멈칫했다.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굽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게 언 뺨 위로, 그녀의 짙은 눈동자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마주 보았다. 3년 전, 그 숨 막히던 15평 오피스텔의 거실에서처럼. 세상의 끝, 이 차가운 장례식장의 공기 속에서 또다시 빌어먹을 '마미흘라피나타파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입술이 먼저 열리기만을 짐승처럼 기다리며 서로의 눈치만 보는, 그 지겹고도 폭력적인 침묵의 늪이 우리의 발목을 다시금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소설가로서의 세련된 문장 축조가 아니었다. 흙 밑으로 영원히 사라져 가는 죽은 자들의 언어가, 다시는 침묵이라는 무덤 속에 사랑을 묻지 말라며 내 등을 거칠게 떠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내 짙은 그림자가 서윤의 그림자 위로 완전히 포개졌다.


"가지 마."


서윤의 붉어진 두 눈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3년 전, 햇살이 부서지던 거실에서 내가 끝내 오역하고 말았던 바로 그 간절한 눈빛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한 발짝 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물러설 곳은 없었다.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린 내 입술에서, 지난 3년간 나를 갉아먹었던 앙상하고 투박한 진심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때... 15평 오피스텔 거실에서, 널 안 잡은 거 후회해. 매일 후회했어. 단 하루도 널 잊은 적 없어."


수사여구도, 세련된 은유도, 문학적인 은폐도 없는 날것의 문장. 번역조차 필요 없는, 세상에서 가장 투박하고 촌스러운 고백이었다.


그 못난 진심이 허공에 흩어져 서윤의 귓가에 닿는 순간.

그녀가 꾹 다물고 있던 창백한 입술이 속절없이 무너지며, 3년 동안 독하게 참고 있던 눈물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길고 길었던 빙하기가 끝나고, 티에라델푸에고의 거대한 만년설이 비로소 녹아내리며 봄을 알리는 경이로운 파열음처럼 들렸다.


우리의 길고 잔인했던 침묵에, 마침내 지워지지 않을 선명한 자막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4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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