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끝, 사전의 시작

by 에반 환 Evan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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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의 젖은 눈동자에서 기어코 탈출한 눈물 한 방울이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공동묘지의 거친 자갈밭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만년설 위에 떨어진 붉은 잉크처럼, 회색빛 얼어붙은 땅 위에 짙고 선명한 주근깨 같은 점을 남겼다. 그 작은 파열음이, 지난 3년 동안 우리 사이를 굳게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얼음 장벽에 금을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녀가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 3년 전, 서울 혜화동의 좁고 무거웠던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서, 자존심이라는 비겁한 방패 뒤에 숨어 꿀꺽 삼켜버렸던 그 말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그녀의 부서진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난... 네가 날 잡지 않아서,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어. 아니, 애초에 우리가 했던 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지독한 의존이었다고 생각했어. 넌 네 소설 속에 갇혀 있었고, 난 네 해석가 노릇에 지쳐 있었으니까. 그래서 떠난다는 나를 존중이랍시고 순순히 보내주는 네 눈빛을 보면서 확신했어. 아, 이 사람은 내가 떠나주는 게 더 편하구나."


그녀의 고백은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되어 내 폐부를 찔렀다. 3년 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내렸던 자책의 판결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형벌이었다. 나는 비릿한 침을 삼키며 가쁜 숨을 헐떡였다. 공기 중으로 뿜어져 나온 내 한숨이 하얀 비명처럼 번졌다.


"아니야, 서윤아. 절대 아니야. 난 네가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네 그 지치고 흔들리던 눈빛이, 나라는 불안한 존재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절규라고 읽었어. 그래서... 이 비겁한 소설가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손을 뻗는 대신, 널 존중해서 보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착각했어. 어른스러운 이별인 척, 비겁하게 침묵 뒤로 숨어버린 거야."


우리는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구 반대편, 거센 바람이 검은 우산들을 무자비하게 흔들어대는 장례식장에서 터져 나온 우리의 웃음은, 상대방을 향한 비소(誹笑)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3년이라는 긴긴 시간을 오해와 오역(誤譯)이라는 감옥에서 허비했다는 사실에 대한 허망함, 그리고 비로소 서로의 '자막'을 읽어냈다는 안도감이 뒤섞인 얄팍한 실소였다.


우리는 말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우리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언어학적 문맹(文盲)들이었다. 우리는 사랑이 부족해서 헤어진 게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서로의 침묵을 온전한 우리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처참하게 실패했을 뿐이었다. 수만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지 마', '사랑해'라는 그 흔하고 평범한 단어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을 몰랐던 바보들이었다.


티에라델푸에고의 미친 듯한 바람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마치 죽은 할머니의 넋이 우리의 진심을 듣고 바람의 신을 잠재운 것처럼, 묘역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3년 전, 그 시린 겨울날 이후 단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을 내 손바닥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체온을 갈구하듯 내 손을 맞잡아왔다.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체온이 내 손을 통해 심장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이제 지구상에 야간어는 정말 끝이야. 이 단어의 온기와 질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없어."


서윤이 내 손목을 꽉 맞잡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연인을 되찾은 기쁨보다,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연구해 온 학문적 유산이 영원히 사라져 간다는 것에 대한 언어학자로서의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도서관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사서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다.


"아니, 끝나지 않았어."


나는 꽉 쥔 취재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할머니의 장례식 내내 조문객들의 탄식 사이에서 내가 움켜쥐고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멸종위기 언어들이 적힌 그 낡고 빛바랜 수첩이었다.


"단어는 단순히 사전에 박제된 활자가 아니야. 그것은 누군가의 입 밖으로 뱉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단어를 듣고 마음이 흔들리는 누군가가 있는 한 결코 죽지 않아. 방금 우리가 3년 묵은 침묵이라는 무덤을 깨고, 투박하지만 살아있는 우리의 언어로 서로를 번역해 낸 것처럼 말이야."


나는 펜을 꺼내 수첩의 첫 페이지를 폈다. 맨 윗줄에 'Mamihlapinatapai(마미흘라피나타파이)'라고 적힌, 그 길고 기묘한 단어 옆에 우리가 3년 동안 겪었던 그 혹독한 빙하기의 죗값을 치르는 심정으로, 우리만의 새로운 해석을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덧붙여 적었다.


(구) 정의: 서로 원하면서도 눈치만 보는 답답하고 지겹고 폭력적인 침묵의 늪.

(신) 정의: 얄팍한 자존심을 꺾고 용기를 내기 바로 직전,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찬란했던 마지막 망설임의 순간.


서윤이 내가 수첩에 쓴 삐뚤빼뚤한 문장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아직 젖은 눈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창백하게 언 뺨 위로, 옅지만 따뜻한 복숭아빛 생기가 돌았다.


"작가님 문장력, 아직 안 죽었네. 이 투박하고 촌스러운 정의라니.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해석가인 크리스티나 할머니도 이 새로운 정의를 보시면 꽤 맘에 들어 하셨을걸?"


"그럼 이 사전, 계속 집필해야 할 텐데.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야간어 해석가인 서윤 언어학자님 자문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앞으로 계속 도와줄래?"


그것은 단순히 사전을 같이 만들자는 제안이 아니었다. 다시 연애하자는 말이기도 했고, 이 비릿하고 차가운 우수아이아에서 시작될 우리의 길고 긴 여행을 함께하자는, 세상에서 가장 투박하고 진심 어린 프러포즈였다.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촉촉해졌다.


"그래. 세상에 사라져 가는 말들이 너무 많아. 할머니의 마지막 목소리를 내가 들었잖아. 그 수많은 쓸쓸한 말들을 혼자 듣기엔, 내 어깨가 너무 무겁고 외로우니까."


우리는 식어버린 커피잔의 테두리만 만지던 낡은 산장 카페를, 그리고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소박한 목관 위로 무겁게 흙이 덮이고 있는 묘역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티에라델푸에고의 검은 하늘에는 어느새 거대한 오로라가 나타나, 지구의 끝이 아니라 마치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폭죽처럼 신비로운 빛을 춤추며 내뿜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눈치를 보며, 상처받을까 두려워 '침묵'이라는 방패 뒤에 숨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번역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어떤 멸종위기 언어가, 또 어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전에 박제된 죽은 언어가 아닌, 우리의 입술을 통해 다시 살아날 따뜻한 말들이 기다려졌다.


(제1장 마미흘라피나타파이 편 - 완결)


(다음 화 예고: 기다림의 의미를 말하는, '이누이트어, 익추아르포크' 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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