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동물원 – 마음을 키우는 색깔 친구들

by 에반 환 Evan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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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는 말이 적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조용했다.

친구들이 웃으며 이야기할 때도 하랑이는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고,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꺼내 조용히 먹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어주면 웃긴 했지만, 하랑이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하랑아, 기분이 어때?”

엄마가 물으면 하랑이는 “몰라요.” 하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속이 뭔가 답답하고 무거운 날도 있었지만, 그게 무슨 감정인지 하랑은 몰랐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는 건 어렵고, 꺼내는 순간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하굣길에 하랑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마음 알림장 – 감정 친구를 만나보세요!’

귀여운 동물 그림이 가득한 파란색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스캐너처럼 생긴 기기와 동글동글한 색연필 다섯 자루가 들어 있었다.

‘이건 뭐지?’

엄마는 아무 말 없었다. 마치 이건 하랑에게만 보이는 선물 같았다.


하랑은 조심스럽게 파란색 색연필을 집었다.

뭘 그릴까 한참 망설이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달팽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조용히 기어가는 달팽이.

“그냥… 나 같아서.”


그 순간, 스캐너에서 반짝! 빛이 났다.

달팽이 그림 위로 빛이 퍼지더니, 종이 위에서 진짜 달팽이처럼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는 파란 달팽이가 하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녕, 하랑. 나는 네 속상함이야.”

하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상함?”


달팽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은 안 해도, 네 마음속에서 내가 자라고 있었지.

너 혼자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잖아.

그래서 내가 먼저 나왔어.

이제부터 내가 함께 있을게.”


그날 밤, 하랑은 달팽이와 함께 누워 조용히 속삭였다.

“나,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달팽이는 등에 하랑의 손을 살짝 비비며 대답했다.

“응. 나는 네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그 조용한 밤, 하랑은 처음으로 외로움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랑은 요즘 학교가 더 힘들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 짝을 지어 놀고, 하랑은 창가에 앉아 가방 지퍼를 괜히 열었다 닫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준호와 태연이 웃으며 장난치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속이 괜히 먹먹해졌다.

그날은 특히 더 그랬다.


점심시간이었다.

하랑은 아끼던 고래 모양 지우개를 필통에 넣어두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거 내 건데…”

하랑이 작게 말하자,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에이, 네가 말 안 해서 그런 줄 알았지. 그냥 써도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 순간, 하랑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확 끓어올랐다.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뜨거워졌다.

손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하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섰다.


집에 돌아온 하랑은 가방을 툭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답답했다.

색연필을 꺼내 종이를 꾹꾹 눌렀다.

빨간 선, 뾰족한 몸통, 작지만 단단한 발.

하랑은 고슴도치를 그렸다.


“나 지금, 화났어…”


스캐너가 반짝이며 빛을 뿜어냈다.

종이 위 고슴도치가 살아나더니, 쏜살같이 하랑 앞에 나타났다.

등에는 불끈불끈한 가시가 서 있었고, 눈은 번뜩였다.

하랑은 움찔했지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고슴도치야…"

하랑이 말을 꺼내자, 고슴도치가 발을 쿵 내딛으며 말했다.

"화가 나면 이렇게 되는 거야! 나처럼 뾰족해지고, 모두를 찌르고 싶어져!"


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어. 준호한테 뭐라고 하고 싶었어. 막 소리치고 싶고… 화났어.”


고슴도치는 등을 휙 돌리며 말했다.

“그런 감정, 참는다고 사라지지 않아.

대신 점점 더 뾰족해지지.

그렇게 계속 두면… 결국 너 자신도 찔리게 돼.”


“그럼, 어떡해?”

“가시를 쓰다듬는 거야. 하나씩. 천천히.”


고슴도치는 하랑의 손을 이끌어 자기 등에 올렸다.

하랑은 조심스럽게 그 뾰족한 가시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쓸어내렸다.

차갑던 등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화는, 나쁜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상처받았다는 표시야.”


하랑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가슴속 답답함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고슴도치의 가시도 천천히, 천천히, 내려앉았다.



다음 날 아침, 하랑은 눈을 떴을 때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벼웠다.

창밖에서 부드러운 햇살이 이불 위로 내려앉았고, 열린 창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구운 계란 토스트 냄새가 고소하게 퍼지고 있었다.

참새 소리가 창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랑은 멍하니 누운 채로 생각했다.

‘기분이… 좋다. 오늘은 왜일까?’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상으로 갔다.

색연필을 펼쳐 놓고 노란색을 집었다.

그리고 종이에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란 몸, 짧은 부리, 또르르한 눈, 그리고 작고 빠른 발.


노란 병아리였다.

그림을 완성하자 하랑은 스캐너를 켜고 그림 위로 가져갔다.

곧이어 반짝이는 빛이 퍼지더니, 그림 속 병아리가 ‘삐약!’ 하고 튀어나왔다.

작고 귀여운 병아리는 하랑을 보자마자 팔짝팔짝 뛰었다.


“하랑~ 오늘 기분 참 좋지?”

하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병아리는 기쁜 듯 깡충깡충 더 높이 뛰었다.


“내가 바로 너의 기쁨이야!

기쁨은 튀고, 노래하고, 가볍게 공중을 도는 거지!”


병아리는 하랑의 손가락 위로 올라타더니 말했다.

“자, 오늘은 노란 산책을 떠나보자!”


하랑은 병아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공원에는 민들레와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병아리는 풀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란 발자국을 남겼다.


“기쁨은 순간이지만, 기억이 되는 거야.”

병아리가 말했다.

“햇빛, 바람, 웃음… 나중에 생각하면 다시 따뜻해지는 기억이 되는 거지.”

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풀밭에 앉았다.

작은 바람이 불고, 병아리가 하랑의 어깨에 살포시 앉았다.


“넌 기쁨이 오래가지 않아서 아쉬울 수 있어.

하지만 괜찮아.

나는 언제든, 네 마음속에서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하랑은 병아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노란 솜털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날, 하랑은 처음으로기분 좋은 하루를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랑의 방 한쪽 벽에는 이제 다섯 장의 그림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파란 달팽이, 빨간 고슴도치, 노란 병아리, 회색 두더지, 그리고 초록 원숭이.

하랑이 그린 감정 동물들이다.

기분이 달라질 때마다 하랑은 그림을 그리고, 동물들은 AR로 나타나 하랑과 시간을 보냈다.

이제 감정이 들면 그림을 그리는 게 자연스러웠고, 그 친구들이 곁에 있으면 하랑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하랑은 침대에 누워 벽에 붙은 동물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너희는… 왜 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그 순간, 병아리가 벽에서 톡 튀어나오더니 말했다.

“우린 특별한 공간으로 널 데려가고 싶었어. 이제 갈 준비가 된 것 같아.”


“어디로?”

“감정 동물원으로!”


다섯 동물들이 동시에 반짝이며 빛을 내자, 스캐너가 스스로 작동되며 하랑의 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찼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하랑은 커다란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곳은 놀라운 세계였다.

길게 뻗은 나무들, 색색의 연못,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들.

그리고 곳곳에 울타리와 표지판이 있었다.

‘슬픔 정원’, ‘화남 바위산’, ‘기쁨 광장’, ‘불안 굴속’, ‘질투 놀이터’ 등등.


“여긴 네 마음속 동물원이야.”

초록 원숭이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진짜 집이지.”


하랑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픔 정원엔 파란 물결이 이는 연못과 조용한 나무 그늘이 있었고,

화남 바위산에서는 불꽃 모양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기쁨 광장에선 노란 풍선이 떠다녔고, 회색 굴속에선 두더지들이 조용히 숨었다 나타났다.

질투 놀이터엔 원숭이들이 서로 따라 하며 어울려 놀고 있었다.


“이런 게 내 마음속에 있었어?”

하랑이 신기해하자, 달팽이가 다가와 말했다.

“응. 감정은 모두 여기에 살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다 들려.

넌 우리를 숨기지 않고 그려줬으니까, 우린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거야.”


하랑은 감정들이 숨지 않고, 당당히 살아 있는 걸 처음 보았다.

고슴도치가 다가와 말했다.

“감정은 나쁜 게 아냐.그냥 ‘너’라는 아이의 한 부분이야.”


그 말을 들은 하랑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감정이란, 나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보여주는 색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 날, 하랑은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다.

복도를 걷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준호를 발견했다.

장난기 많고 목소리 큰 준호였지만, 오늘은 어딘가 조용하고, 어깨도 조금 축 처져 보였다.

책상 위에 얹힌 손가락은 계속 같은 자리를 문지르고 있었고, 시선은 창밖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나 같아.’


하랑은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색연필 주머니에서 회색 색연필을 꺼냈다.

종이에 작고 둥글둥글한 두더지를 그렸다.

작은 발, 뾰족한 코, 겁먹은 눈동자.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이 담긴 그림이었다.


스캐너를 가져다 대자, 두더지는 ‘푸슉!’ 하고 종이 위에서 튀어나왔다.

회색 털을 흔들며 눈을 깜빡인 두더지가 말했다.

“저 아이, 지금 숨고 싶어 하고 있어.

말은 안 하지만, 마음속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야.”


하랑은 두더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나도 저랬어. 아무도 날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두더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거야.”


하랑은 조심스럽게 준호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은 준호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작은 그림 한 장을 건넸다.

두더지가 자기 굴에 쏙 들어가 있는 그림.

작지만 따뜻하게 그려진 작은 위로였다.


준호는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거… 뭐야?”

하랑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나 같았던 거. 그리고 오늘은 너 같아서.”


준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고마워. 근데, 이거 진짜 귀엽다.”


하랑은 작게 웃었다.

그 순간, 어깨 위에서 노란 병아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속삭였다.

“봐봐. 넌 이제,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야.”


달팽이, 고슴도치, 병아리, 두더지, 원숭이—하랑의 감정 친구들은 하나둘씩 반짝이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조용히 하랑의 마음속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넌 우리 없이도 괜찮아.”

달팽이가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넌 스스로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준호를 향해 말했다.


“준호야,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좋아.”


그날, 하랑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도시락을 나눴다.

감정 친구들은 조용히 하랑의 마음 한켠에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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