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팔과 철거 사이에서
서소문고가가 철거된다고 했다.
1966년에 태어나 2025년에 생을 다한 길.
을지로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이십 년 가까이 그 위를 지났다.
“곧 도착이겠지” 하는 기대와
“아, 또 막히네” 하는 체증이 늘 함께였다.
나는 그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고, 급한 일정도, 퇴근길의 지친 어깨도
그 길에 얹어 보냈다.
사라지는 것들에 유난히 마음이 약한 나는
철거가 시작된 뒤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사진을 남겼다.
머리에 한 장, 눈에 한 장, 휴대폰에 또 한 장.
괜히 각도를 바꿔가며 찍는 건
오래된 친구를 배웅하는 나만의 예의 같아서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무 예고 없이 멀어진 한 사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먼저 다가와 마음을 건넸고 나는 그 마음이 반짝인다고 믿었다.
인스타 소식이 뜸해지자 괜히 걱정부터 했다.
무슨 일 있나,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하지만 알게된 건 조용한 ‘언팔’.
설명도, 인사도 없이.
남겨진 건 당황과 미련, 그리고 ‘왜?’라는 질문.
부서지는 고가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보며
나는 내 감정도 저렇게 툭, 떨어져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치질 몇 번에 서운함이 산산이 흩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쓸모를 다한 구조물이 해체되듯 이미 끝난 인연도 깔끔히 정리되면 좋으련만,
고가는 말없이 부서지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유를 붙잡고 서성인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그 길도, 그 사람도 각자의 역할을 다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차를 실어 나르던 고가처럼
그녀는 내 어설픈 설렘과 들뜬 기대를
잠시 받아주었고, 우리는 그만큼 즐거웠다.
나는 쉽게 믿고, 금세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관계는 오래, 어쩌면 영원할 거라 믿는 사람이었다.
문득 지드래곤의 노래가 스친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가사처럼 삐딱해질 용기는 없지만,
적어도 영원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기로 했다.
조금은 자랐고,
조금은 단단해졌다.
쓰임을 다한 길은 사라지고
쓰임을 다한 인연도 멀어진다.
하지만 그 위를 지나온 시간만큼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이제 나는 순진하게 들떠 있던 나를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손잡아 일으켜 세운다.
막히지 않는 새 길을 찾기보다 막혀도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되기로.
천천히,
내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