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어색하지 않는 사이
"엄마는 친한 친구가 있어? 친하다는 게 엄마한테 어떤 의미야?“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차 안 신호 대기 중이었다.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해 신호등 빨간불에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뭐야? 계집애 아직 내게 삐져있었나? 맛있는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우리 분위기 괜찮았잖아.....’
한 달 전, 입시 전공 관련 중요한 시험 결과가 좋지 않자 딸아이는 여기까지라며 바로 포기했다. 엄마가 원해 시작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먼 미래까지 할 자신이 없단다. 비겁한 변명 같아 화가 났고 지금까지 고생한 게 아까워 속상했다. ‘그럴 거면 시작을 하지 말던가? 학원비가 얼만데......’
잘하고 있던 아이가 처음으로 날을 세우자 당황했고 곧 짜증을 섞어 아무 말을 쏟아냈다.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엄마도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밀어주고 싶어. 절실함이 있어야 하는데 넌 너무 여유 만만이야, 이게 내 공부니?" 딸아이는 씩씩거리며 쏘대는 내게 작게 말하라고 손짓하며 세상 힘 빠지게 하는 억양과 목소리로,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몰라 답답하고 괴로워. 하지만 이 시험 준비하면서 이건 절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정해진 미래보다 찾아가는 미래를 꿈꾸고 싶어, 내 미래잖아." 차근차근 나직한 목소리는 속을 뒤집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처럼 깊이 숨겨둔 화를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더 열받는 사람이 지는 이 게임에서 이미 성패는 결정 났다. 서로의 감정이 해결되지 않은 채 기숙사로 떠났고 그 후로 한 달이 흘렀다. 계속되는 시험과 입시 준비로 어젯밤 달빛에 어린 딸 얼굴은 표나게 핼쑥했다. 옆에서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어미는 성이나 내고...... 안쓰러운 마음에 양팔을 벌리니 씩 웃으며 쏘옥 안긴다. 그래서 감정이 다 풀렸다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나를 닮아 쿨하다 생각했는데 뒤끝이 있었던 게야. 그러니 갑자기 친구가 있긴 해?라고 묻겠지' 괜히 찔려 정답을 맞히고 싶어 안달이 난다. 차 속의 공기를 모두 삼킨 채 목소리에 무게를 가득 실어 답한다. 마치 그게 정답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글쎄,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예쁜 노을을 함께 나누고 싶어 전화할 수 있는 사람, 내 전화가 무례할까 고민 없이 편하게 말이야 그 정도."
답을 찾았다 생각하는 순간 스치는 친구가 떠올라 다행이다 싶다.
"너는? 있어? 넌 어때?"
나와는 너무 다른 딸의 친구가 궁금했다.
"음 나는 엄마, 침묵이 어색하지 않는 사람이 친하다고 생각해. 혼자가 제일 편하지만 그 친구랑 있어도 어색하지 않으니 친한 거겠지. 많진 않고 한두 명"
차 안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딸의 대답에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순간 등줄기를 스치는 전율과 함께 가느다란 안도의 숨을 내쉰 것 같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고집이 있는 큰 아이에 비해 둘째 아이는 언제나 조용히 자기 일만 묵묵히 하는 아이라 마음이 더 쓰였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간섭을 했고 그게 사랑이라 믿었다.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는 아이를 애써 외면한 채 고집을 피우던 나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라는 말 한마디에 무장해제가 됐다.
그렇게 우리는 노을빛이 유난히 황홀했던 2024년 10월, 협재 사거리에서 마치 오래된 동맹이 끝나듯 서로에게 독립을 선포했다.